처음 노르웨이의 숲을 읽었을 때, 내가 느낀 건 슬픔도 상실감도 아니었다. 단 하나, “너무 야하다.” 학교에서 얼굴을 붉히며 몰래 읽었던 그 책을, 나는 어른이 되어 다시 펼쳐본다.
시간이 흐른 지금, 다시 읽으니 무덤덤하다. 예전엔 엄청난 금서를 읽는 느낌이었는데. 어른이 되어버렸구나. 물론 미도리가 주인공 와타나베에게 툭툭 던지는 말은 도발적이긴 하지만. 아무튼 이 남자 주인공 와타나베, 여자 복은 많은데 연애는 하나도 못 한다.
와타나베는 조용한 사람이다. 책을 좋아하고, 혼자 있는 걸 즐긴다.
친구가 적은 이유는 어쩌면 고등학교 시절 단짝이었던 기즈키의 죽음을 아직도 잊지 못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나오코는 그 기즈키의 여자친구였다. 와타나베는 그녀를 좋아했지만, 감정을 다 드러내지 못한다. 죄책감 때문일까?
일요일이 되면 죽은 친구의 여자 친구(나오코)와 데이트를 했다. 도대체 지금 내가 무엇을 하는지, 무엇을 하려 하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나는 대학에서 친구를 하나도 만들지 않았고 기숙사 동료들과도 그냥 아는 사이 정도로 지냈다. 기숙사 동료들은 내가 늘 혼자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내니까 작가를 지망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듯했는데, 작가가 될 생각은 별로 없었다. 뭐가 되고 싶다는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
무라카미 하루키 «노르웨이의 숲»
소설을 읽으며 이 글의 얼마만큼이 하루키의 이야기일까 생각한다. 책을 좋아하고, 레코드로 음악을 듣는 건 진짜 작가의 취향일 것이다. 나오코도 진짜였을까? 하루키도 젊었을 때는 방황했을까?
어이, 일어나, 나 아직 여기 있다니까. 일어나, 일어나서 알아내라고. 내가 왜 아직도 여기 있는지 그 이유를. 일어나, 알아내, 하면서. 그래서 나는 지금 이 글을 쓴다. 나는 무슨 일이건 문장으로 만들어 보지 않으면 사물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타입이니까.
이 부분은 작가의 말인 것 같다. 알아내, 알아내 하면서 글을 쓰는 하루키를 상상할 수 있을 것 같다.
나오코가 입원하고 멀어진 후에도 대학 수업에서 적극적으로 들이대는 미도리라는 여자애와 친해진다. 이 책에 나오는 네 여자들 중 나는 미도리가 제일 마음에 든다. 그녀의 생기발랄함이나 톡톡 튀는 엉뚱함이 좋다. 와타나베의 무기력한 일상은 고구마인데, 미도리는 방긋 웃으며 데이트 신청을 한다.
미도리가 뇌종양을 앓는 아버지를 간병하는 장면이 가장 슬프면서도 가장 생기있는 장면이었다.
"오이? 어째서 오이 같은 게 여기 들었지? 언니는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키위를 사두라고 했는데. 어떻게 환자가 오이를 씹을 수 있겠어? 아빠, 오이 먹고 싶어?"
(미도리 아버지는 입맛이 없어 거의 아무것도 먹지 못한다. 문병을 간 와타나베가 그에게 묻는다.)
"배가 고파서 오이를 먹을 생각인데 괜찮을까요?"
미도리 아버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세면장으로 가서 오이 세 개를 씻었다. 그리고 접시에 간장을 조금 붓고 오이에 김을 말아 간장에 찍어 아작아작 씹어 먹었다.
"정말 맛있네요. 단순하고 신선하면서 생명의 향기가 나요. 좋은 오이에요. 키위보다 훨씬 좋은 것 같아요."
나는 한 개를 다 먹고 하나를 더 집어 들었다. 아작아작, 아주 기분 좋은 소리가 병실에 울려 퍼졌다.
"물이나 주스 드실래요?" 나는 물어보았다.
"오이." 그가 말했다.
나는 방긋 웃었다. "좋죠, 김으로 말까요?"
"맛있어."
"먹는 게 맛있다는 건 정말 좋은 일이에요. 살아 있다는 증거니까요."
무라카미 하루키 «노르웨이의 숲»
또, 이유는 모르겠지만 이 책에서 나온 '미드나이트 블루'라는 색이 강렬하게 마음에 남는다. 와타나베가 누나처럼 생각하는 하쓰미의 드레스 색이다.
나한테도 하쓰미 씨 같은 누나가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생각이 갑자기 드는 거예요. 스마트하고 시크하고 미드나이트 블루 원피스와 금 귀걸이가 잘 어울리고 당구도 잘 치는 누나.
밑줄친 인용문들:
"나를 기억해 줬으면 좋겠어. 내가 존재하고 이렇게 네 곁에 있었다는 걸 언제까지 기억해 줄래?"
"네가 정말 좋아, 미도리."
"얼마나?"
"봄날의 곰만큼 좋아."
"봄날의 곰?" 미도리가 고개를 들었다. "그게 뭔데, 봄날의 곰이?"
"네가 봄날 들판을 혼자서 걸어가는데, 저편에서 벨벳 같은 털을 가진 눈이 반짝반짝한 귀여운 아기곰이 다가와. 그리고 네게 이렇게 말해. '오늘은, 아가씨, 나랑 같이 뒹굴지 않을래요.' 그리고 너랑 아기곰은 서로를 끌어안고 토끼풀이 무성한 언덕 비탈에서 데굴데굴 구르며 하루종일 놀아. 그런 거, 멋지잖아?"
"정말 멋져."
"그 정도로 네가 좋아."
우리에게도 정상적인 부분이 있어. 우리는 스스로 비정상이라는 걸 안다는 거지.
"마음을 열면 어떻게 되죠?
"회복하는 거지."
그런 훈련을 해 두면 어떤 일들은 하기 쉬워질 거야.
하루키의 글은 재밌다. 야하기도 하고, 슬퍼서 먹먹해지기도 하고, 무기력한 모습을 보면 짜증나는데 그리운 감정이 올라오기도 한다. 잊었던 감정이 떠오르기도 한다. 미도리의 엉뚱함, 오이를 씹던 병실의 따뜻함, 하쓰미의 미드나잇 블루…
그런 감정을 느끼려고 우리는 책을 읽고, 또 이렇게 글을 쓰는지도 모른다. 내가 여기 있다는 걸 기억해 주고, 왜 여기에 있는지 알아내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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