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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아유타국에서 가야로 시집온 공주, 허황옥

by 밀리멜리 2021. 6.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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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유전자 검사 스토리를 쓰면서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다 보니 정말 허황후 이야기가 궁금해졌다. 우리나라의 허씨는 대부분 이 고대 인도 공주의 후손이란 말이잖아?

 

인도 모디 총리는 한국에 방문해 대통령을 만날 때마다 허황옥 이야기를 꺼냈다고 한다. 2018년엔 아예 인도 전통 무용단을 보내 고대 가야국 수로왕과 아유타국의 공주 허황옥 이야기를 무용으로 꾸며 공연을 열었다고 한다. 인도에서는 아요디아 시에 허황후 기념공원을 착공할 때 한국의 국빈을 초대했다.

인도의 총리가 이 이야기를 언급하고, 기념공원까지 꾸밀 정도라면 인도에도 널리 알려진 이야기가 아닌가 싶다. 일연의 삼국유사에 실린 2천년 전 허황후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삼국유사의 허황옥 이야기

 

기원후 48년 5월 어느 날, 서역 아유타국의 공주 허황옥은 부왕의 부름을 받았다. 부모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꿈에 황천상제가 나타나 '가락국의 왕 수로는 하늘이 내려보낸 왕인데, 아직 배필을 정하지 못하였다. 공주를 시집보내라'고 말씀하셨다. 꿈을 깬 뒤에도 황천의 말씀이 쟁쟁하다. 너는 곧 이 자리에서 부모를 작별하고..."

 

겨우 16살이었던 공주는 그 말을 듣고 바로 시집갈 준비를 했다. 이역만리 모르는 곳으로 시집을 가는 공주의 마음이 어땠을지 알 길이 없지만, 그녀는 군말 없이 20명의 시종을 이끌고 갖가지 금은보화를 싣고 가락국으로 가는 배를 탔다. 

 

2천년 전 허황옥이 탄 배는 붉은 돛과 붉은 깃발을 달았다고 한다

 

그러나 곧 이 배는 파도신의 노여움에 막혔다. 풍랑이 너무나 거세 돌아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공주가 돌아와 부왕에게 이 사실을 알리자 부왕은 '파사석탑을 가져가라'고 명했다.

 

과연 5층으로 된 파사석탑을 실으니 배가 잠잠해졌고, 두 달 여간의 항해 끝에 7월 27일 공주를 태운 배가 가락국 금관 앞바다에 닿았다. 김수로왕은 신하들을 시켜 궁궐로 허황옥을 모셔오게 했는데, 배 안에 타고 있던 허황옥이 이렇게 말했다.

 

"나는 그대들과 전혀 모르는 사이인데, 말만 듣고 어찌 경솔하게 따라갈 수 있겠는가?"

16세 소녀가 왕을 부르는 위엄이 대단하다. 자신을 맞이하는데 왕이 직접 오지 않고 왜 신하들을 보내냐는 호통에, 수로왕은 그 말이 옳다고 여겨 직접 해안가로 와서 허황옥을 맞이했다.

 

마침내 허황옥은 별포 나루에 배를 대고 육지로 올라온 후, 산의 높은 언덕에서 입고 있던 비단 바지를 벗어 폐백 삼아 산신령에게 바쳤다. 이때 시종으로 따라온 사람이 20명이나 되었으며, 배에 싣고 온 것도 금수능라(수를 놓은 비단), 두껍고 얇은 비단, 필로 된 비단, 금, 은, 유리, 구슬, 옥, 여러가지 장신구 등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화려한 혼수품을 싣고 온 공주 (사진: 픽사베이)

가야도 금을 좋아해 금관과 금귀걸이, 금허리띠 유물이 유명하다. 오죽했으면 가락국이 금관가야라고 불렸을까? 그 금관가야의 첫 왕비 혼수품이니 그 규모와 화려함이 어마어마했을 것이다. 게다가 그녀가 타고 온 붉은 돛을 단 배는 무려 5층 석탑을 실어야 뒤집어지지 않을 정도였으니 그 커다란 배에 실린 보물은 정말 대단했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수로왕은 왕후를 맞아 궁궐로 함께 들어갔고, 그녀의 시종들에게도 편안한 거처와 음식을 마련해 주었다.

 

예식이 끝나고 침전에 들자 왕후가 수로왕에게 조용히 말했다.

 

 “저는 아유타국의 공주입니다. 성은 허(許)라 하고, 이름은 황옥(黃玉)이며, 나이는 열여섯 살입니다. 본국에 있을 때 5월 어느 날 부왕과 모후께서 제게 말씀하시기를, ‘우리 내외가 어젯밤 꿈에 함께 하늘의 상제를 만나 뵈었다. 상제께서 말씀하시기를 가락국왕 수로는 하늘이 내려보내 왕위에 오르게 한 신성한 사람이다. 그가 새로 나라를 다스리는데 아직 혼처를 정하지 못했으니, 그대들은 공주를 보내 배필을 삼도록 하라’ 하시고는 말을 마치자마자 하늘로 올라가셨다고 합니다. 꿈에서 깨어난 뒤에도 상제의 말씀이 귀에 생생하니, ‘너는 이 자리에서 곧 부모와 작별하고 그곳 가락국을 향해 떠나거라’ 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배를 타고 멀리 나가 신선이 먹는 대추(蒸棗)를 구하고, 하늘로 가서 선계의 복숭아(蟠桃)를 얻은 후 마침내 이곳으로 달려와 용안을 뵙게 된 것입니다.”
 
이때 김수로왕이 대답했다.
 
“나는 태어나면서부터 자못 신성하여 공주가 먼 곳에서 올 것을 미리 알고, 왕비를 맞이하자는 신하들의 간청을 구태여 따르지 않았소. 그런데 이제 현숙한 그대가 몸소 내게 왔으니, 이 사람으로서는 참으로 다행한 일이오.”
 
드디어 둘은 혼인을 하고 2박 3일의 꿀같이 달콤한 허니문을 보냈다. 그 후 공주가 타고 온 배를 돌려보내게 되었는데, 이때 배에 오른 뱃사공이 모두 15명이었다. 이들에게 각각 쌀 열 섬과 베 서른 필을 주어 본국으로 돌아가게 했다.

 

그 후로 둘은 열 명의 아이를 낳았는데, 맏아들은 김씨로 왕위를 잇고 둘째와 셋째 아들은 허황옥의 뜻대로 허씨 성을 물려받았다. 가야는 이후로 약 500년간 계속되었다가 532년 신라에 통합되었다.

 

[자료 참고: 우리 나라에 불교를 처음 들여온 허황옥 http://monthly.chosun.com/client/news/viw.asp?ctcd=&nNewsNumb=201810100059]
 

 

 

 파사석탑은 어떤 모양이었을까

 

김해 허황후릉 옆의 파사석탑 (국립중앙박물관)

 

허황옥이 처음 배를 타고 가락국으로 오려고 할 때, 풍랑에 막혀 돌아올 수밖에 없었는데, 아유타국의 부왕은 파사석탑을 싣고 가라고 명했다고 한다. 이 파사석탑 이야기는 삼국유사에 이렇게 기록되고 있다.

 

“금관성 호계사(虎溪寺)의 파사석탑은 옛날 이 읍(邑)이 금관국으로 되어 있을 때, 세조 수로왕의 비(妃) 허황후(許皇后) 황옥(黃玉)이 동한(東漢) 건무(建武) 24년 갑신(甲申)에 서역의 아유타국(阿踰陁國)에서 싣고 온 것이다. 처음에 공주가 어버이의 명을 받들고 동쪽으로 오려고 하다가 파신(波神)의 노여움에 막혀서 할수없이 돌아가 부왕(父王)에게 아뢰니 부왕이 ‘이 탑을 싣고 가라.’ 하여 무사히 바다를 건너 남쪽 물가에 와서 닿았는데, 비범(緋帆)주 02)·천기(茜旗)주 03)·주옥(珠玉)의 아름다움이 있었으므로 지금도 이곳을 주포(主浦)라 한다. …(중략)… 탑은 사면으로 모가 나고 5층인데, 그 조각이 매우 기이하며 돌에는 조금씩 붉은 반점이 있고 석질이 매우 부드럽고 특이하여 이 지방에서 구할 수 있는 돌이 아니다. ”

《삼국유사》 권 제3 탑상편 제4 금관성파사석탑조(金官城婆娑石塔條)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파사석탑(婆娑石塔))]

 

삼국유사를 지은 일연 스님도 이 돌은 이 지방에서 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기록했다. 실제로 국립중앙박물관이 고려대 산하협력단에 이 탑의 산지와 특성을 분석 의뢰했더니, 비파괴분석결과 한반도에서는 나지 않는 엽랍석 사암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또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이 파사석탑이 등장한다.

 

무엇보다도 석탑이 5층에 붉은 색이 아름답고 조각이 기이하다고 쓰여 있는 부분에 눈길이 간다. 2천 년이라는 오랜 세월이 지나 탑이 크게 손상되어 지금은 그냥 돌처럼 보이지만, 원래 파사석탑의 조각이 얼마나 아름답고 신비로웠을지 궁금하다. 

 


더불어 가야에 대한 기록도 많이 남아있지 않다. 가야 왕국도 조선과 비슷하게 약 500년이라는 오랜 세월동안 지속된 나라이다. 기록에 진심인 조선과 비교하기는 좀 그렇긴 하지만... 아무튼 가야가 워낙 오래된 고대 국가이기도 하지만, 역사는 역시 강자의 기록이라는 말이 맞는지 서기 532년 신라에 통합된 가야에 대한 이야기는 삼국유사에서조차도 많지 않다. 그래서 실제로 아유타국이 어디인지, 허황옥이 이 시기에 불교를 도입했는지도 이야기가 분분하다.

 

하지만 먼 곳에서 시집온 인도 공주의 이야기는 신비하기도 하고 아름다워서, 기록이 부족하다는 점이 더 큰 상상력을 자극한다. 학창 시절 국사 책을 펴면 가장 첫 챕터부터 고대사를 배우는데, 고대사 중에서도 아유타국 출신의 가야 왕비 허황옥 이야기는 너무 재미있어서 나는 자주 딴 생각에 빠지곤 했다. 그러다 수업 진도가 어느새 삼국시대로 넘어가 있을 때쯤에야 정신을 차리곤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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