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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글5

어느 밤, 우주로의 초대장 "같이 갈래?" 어느 밤, 부서질 정도로 환하게 별이 많은 밤에 피터가 물었다. 밥 먹었냐, 하는 듯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지만 그의 목소리에는 장난기가 가득했다. 1초도 버티지 못하고 그는 굳어있던 표정을 풀며, 바보같이 화아- 하고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거절이라는 건 생각해 본 적 없듯이, 그렇게 웃었다. 그가 신이 나서 말했다. "어! 어떻게 너를 만났지? 이건 확률이 낮은 일인데. 와! 이건 대단한 일이야! 너, 나랑 같이 가자!" "그게 무슨 말이야? 너 누구야?" "나 몰라? 나야, 피터. 너, 저곳에 얼마나 멋있는 일이 가득한지 너도 알지! 별빛만큼 많은 장소에서 이상하고 재미있는 일들이 매 순간 벌어진다는 것. 이 세상 누구보다도 네가 잘 알잖아. 다른 사람들은 모르고 있지만, 너는 이 시.. 2020. 10. 8.
우울증에 관하여 마음의 감기라고도 불리는 우울증은 그 별명처럼 누구나 한 번씩 앓는 거라고 합니다. 그러니 약 처방받는 걸 부끄러워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하는 말을 들어보셨죠. 제약회사의 광고 같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정말 필요한 것 같기도 합니다. 저는 약간 회의적이에요. 효과가 좋지만, 부작용이 더 좋죠? 하하. 평생 달고 먹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끊으면 미칠 것 같으니. 우리가 우울증을 현대인의 고질병이라고 하지만, 사실 문명의 혜택을 받지 못하는 원주민도 우울증을 종종 앓죠. 이 우울증이라는 건 사실, 마음이 일으키는 병이 아니라 인간의 유전자에 기록된 실제적인 질병입니다. 유전자에 기록되었다는 것은 다시 말해 우울증에 취약한 유전자들이 살아남았다는 것인데요. 재미있는 건 우울증이 자살 충동을 일으키는 동시.. 2020. 9. 25.
인어공주 그 후 물안개가 흰구름처럼 피어오른다. 인어공주는 한가롭게 꼬리로 수면을 톡톡 치면서 놀고 있었다. "물거품이 되었을 때는 기분이 어땠어?" "사르르하고, 슬픔이 사라지는 기분이었지." "왜 슬펐는데?" "사랑을 잃었으니까." 하고 꿈꾸는 듯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인어공주의 머리칼이 너울너울 흘러내렸다. "아, 왕자에게 배신당했었지." "응." "그 왕자는 다른 여자랑 결혼했어. 복수하고 싶지 않아? 너는 칼에 맞고 거품이 되어버렸는데." 그 질문에 인어공주는 희미하게 웃음인지 슬픔인지 뜻 모를 표정을 지었다. "아가, 내가 물거품이 되기로 한 건 내 인생 최고의 결정이었어. 그 때 나는 너무 외로웠거든. 그래서 노래를 불러 인간을 내 곁에 끌어들였어. 하지만 아무리 노래를 불러도 인간들은 대답을 해주지 않더라.. 2020. 9. 23.
유나의 얼굴에는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아무렇게나 올려 묶은 머리는 시간이 갈수록 아무렇게나 흐트러졌다. 더 이상 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옆자리 운전석에 앉은 강석은 아직도 분이 풀리지 않는지 유나의 귀에 대고 욕지기를 하더니 금세 술이 깬 모양이었다. 강석의 얼굴에 후회의 빛이 어렸다. 하지만 조금 전 뺨을 크게 한 대 맞은 유나는 귀가 먹먹해져 흐린 눈으로 강석을 바라볼 뿐이었다. "멍 심해지겠다. 마사지 잘해서 풀어." 유나는 그저 체념한 듯 웃었다. 그녀는 아무 말 없이 차 문을 열고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유나의 크림색 니트 카디건이 스르르 떨어져 가녀린 어깨가 드러났다. 흰 피부 위에 보이는 시린 멍 자국이 아직은 쌀쌀한 그 날 새벽하늘 색깔 같기도 했다. 강석은 떠나는 유나를 굳이.. 2020. 9. 21.
어느 밤, 아이리시 펍 아직 해가 떠 있는 이른 저녁이지만 거리는 북적였고 가게들은 저마다 작은 조명을 밝히기 시작했다. 붉은 벽돌과 제라늄 화분 사이 흑판에 흰 분필로 적힌 낯 뜨거운 칵테일 이름들이 눈길을 끌었다. 여자는 가슴이 길게 패인 검은 드레스를 입고 들어왔다. 일순 펍에 있던 손님들이 여자의 드레스를 스치듯 탐닉했다. 여자는 벽난로 옆 스툴에 앉아 엘더플라워 진토닉을 주문했다. 성 축일이랍시고 쨍한 초록색 옷을 입고 기네스만 마셔대는 것 따위는 딱 질색이었다. 한 모금. 라임향이 감도는 차가운 잔을 입에 가져다 대었다. 누군가 바이올린을 켰다. 또 한 모금. 뜨거운 것이 목을 타고 적시다가 확 하고 알콜향이 퍼졌다. 누군가 원목 바닥을 구둣발로 두드리며 춤을 추었다. 진토닉을 비웠다. 옆에 앉은 어느 여행객은 그녀.. 2020. 9. 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