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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글

어느 밤, 우주로의 초대장

by 밀리멜리 2020. 10.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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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갈래?"

 

어느 밤, 부서질 정도로 환하게 별이 많은 밤에 피터가 물었다. 밥 먹었냐, 하는 듯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지만 그의 목소리에는 장난기가 가득했다. 1초도 버티지 못하고 그는 굳어있던 표정을 풀며, 바보같이 화아- 하고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거절이라는 건 생각해 본 적 없듯이, 그렇게 웃었다. 그가 신이 나서 말했다.

 

"어! 어떻게 너를 만났지? 이건 확률이 낮은 일인데. 와! 이건 대단한 일이야! 너, 나랑 같이 가자!"

 

"그게 무슨 말이야? 너 누구야?"

 

"나 몰라? 나야, 피터. 너, 저곳에 얼마나 멋있는 일이 가득한지 너도 알지! 별빛만큼 많은 장소에서 이상하고 재미있는 일들이 매 순간 벌어진다는 것. 이 세상 누구보다도 네가 잘 알잖아. 다른 사람들은 모르고 있지만, 너는 이 시공간이 소용돌이친다는 것, 그래서 한 발짝만 내딛어도 다른 시간과 공간에 갈 수 있다는 걸 알지? 어디로 가고 싶은지 말만 해!"

 

"다른 시간과 공간? 그럼, 공룡 보고 싶어."

 

"지구의 과거가 보고 싶어? 공룡? 그딴 시시한 걸 뭐하러 보러 가? 51 시간대의 타를타놀타 행성에 지어진 놀이공원에 가보는 건 어때? 거기 놀이공원은 51시간대일 때 최고야! 새로운 게임 장치가 있는데, 지구인의 인생을 한번 체험해 볼 수 있는 게임기야! 짜릿한 놀이기구도 정말 잘 만들거든, 타를타놀타 사람이."

 

그는 놀이공원 생각만 해도 신이 나는지, 웃으며 빠르게 설명했다.

 

"그래도, 공룡 보러 가면 안돼?"

 

"그래도 지구가 궁금해? 지구는 재미있는 거 별로 없는데... 하하, 너 지구인이라고 무시하는 건 아니지만, 지구는 23, 그리고 53, 284 시간대를 빼고는 딱히 흥미로운 게 별로 없어. 그래서 겨우 3 시간대의 사람인 네가 나를 만날 줄은 몰랐거든."

 

"3 시간대가 뭐야? 내가 3시간대 사람이야?"

 

"지구에서 1시간대는 고대 문명시대. 25억년 쯤인가? 그러다 멸망해서 한창 또 문명을 세웠는데, 공룡이 있던 때가 2 시간대, 너네가 3 시간대야. 그 뭐시냐... 너희가 아는 4대 문명이라고 부르는 중국, 인도, 이집트, 소아시아 그런 거. 그게 너네 3 시간대지. 이제 막 시작한 어린 시간대야."

 

"피터, 23시간대에는 지구가 재밌어져?"

 

"오, 그때는 지구가 우주에서 이름을 좀 떨칠 때긴 하지. 지금은 너무 어려. 23시간대 생명체들은 젠틀하고, 쿨한 편이야. 3세대 사람은... 정말 아무것도 모르지. 무식하고, 제멋대로야. 앗, 미안해, 네 욕하는 건 아니지만. 너희는 정말 멋진 생명체의 조상들이니, 그건 존경해."

 

나는 가슴이 벅차올랐다. 공룡이 살기도 전에 있었다는 1 시간대라는 고대 문명시대는 뭘까?  내가 속한 수천 년에 가까운 문명시대가, 그저 한 시간의 조각에 불과하다니. 그것도 어리고 무식해서, 제멋대로 하는 생명체가 사람이라니. 23시간대쯤이나 되어야 성숙해진다는 지구의 생명체는, 도대체 어떤 모습일까?

 

"3 시간대 사람들은 시간 밖으로 나올 줄도 모르고, 공중에 떠 있는 방법도 몰라! 정말이지, 그런 것도 안 배우고. 그나마 1시간대 사람들은 너희보단 똑똑했는데, 어떻게 더 퇴화한 거야? 그리고 너, 너는 어떻게 나를 만난거야? 이왕 시간 밖으로 나와서 만나게 된 거 나랑 같이 가는 게 좋을 걸? 이미 시간 조각들이 너한테 덕지덕지 달라붙었어! 어휴, 이 조각들 좀 봐."

 

하고 그는 내 머리칼에 유리파편같은 조각이 달빛에 차르르 빛나는 것을 보고, 질렸다는 표정을 하고 내게 다가와 후우-, 하고 조각들을 불었다. 그 조각들은 잠시 날아가더라도, 다시 내 어깨 위로 돌아와 앉았다. 아랑곳않고 내 머리카락을 잡고 후우, 후우 하고 장난스럽게 먼지를 털 듯이 그 시간 조각들을 털었다.

 

"정말 1 시간대라는 고대문명시대가 있어? 공룡 전의 문명세계가 있다구?"

 

"이것 봐, 참. 너네 3 시간대 사람은 참 문제라니까. 21시간대가 쿨한 애들이라고 내가 말했는데, 겨우 공룡 전 시간대의 그저그런 1 시간대가 궁금하다니! 참. 지네들만 중요하지, 뭘 모르는 애들이야. 후우! 여기 너 머리카락에 붙은 거 봐, 루벨 행성의 8이랑, 이거 크란데스트 행성의 314 시간대, 오, 이건 좋은 건데, 나 주라. 나랑 가자구. 가면 다 알게 돼." 

 

그가 내 머리칼에서 생선 비늘같은 조각을 하나 떼어내 주머니에 담았다.

 

조용한 방 안의 컴퓨터가 우웅거렸다. 책상 위엔 온갖 영양제가 흩어져 있고, 마시다 식어버린 커피잔에는 커피 찌꺼기가 링을 만들어 냈다. 한참 동안 치지 않은 기타에는 먼지가 뽀얗게 내려앉았다.

 

기분이 이상했다. 이런 별빛은 본 적이 없었다. 최근에는 한낮에도 파란 하늘이 없고, 온통 회색빛이니까. 밤하늘에서 별빛을 볼 수 있을 리 없다. 목이 매캐해지고, 눈이 따끔해서 눈물이 날 정도로 미세먼지가 많은데. 기껏해야 흐리게 번지는 달이나 볼 수 있었는데, 어떻게 이렇게 부서지는 별빛을 내 방안에서 볼 수 있을까.

 

"여기에 버릴 수 없는 게 있어."

 

부모님, 좋아하는 사람, 지겹게 했던 공부와 직장. 그걸로 모아 놓은 적금과 투자 펀드. 하지만 무엇보다도, 내가 사랑하던 사람들과 함께 보냈던 그 시간, 시간들.

 

"그래? 그럼 어쩔 수 없지."

 

하고, 그는 훌쩍 떠나버렸다. 인사도 채 하지 않고, 그는 모습을 감추었다.

 

떠들썩하게 신나던 목소리는 갑자기 자취를 감췄고, 캄캄한 침묵이 찾아들었다. 그렇게 한참을 멍하니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나는 한없이 외로워졌다. 컴퓨터는 화면 보호기가 켜진 채 계속 우웅거렸고, 핸드폰이 새로운 메시지를 알리며 깜박거렸다. 매캐한 공기 탓인지 나는 눈물이 났다. 삐- 하면서, 왼쪽 귀에서 이명이 들리는 것 같기도 했다. 피터의 모습은 사라졌지만, 무너져 내리듯 쏟아지는 별빛이, 압력이 밀려오는 것 같은 그 빛들은 그대로였다.

 

정말 탁한 공기 탓인지,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나는 어른이 된 거로구나. 공허한 마음을 채울 길이 없었다. 텅 빈 채로, 나는 그가 사라진 곳을 말없이 응시했다.

 

"그렇담, 내가 선물이라도 줄게. 이런 아름답고 재밌는 시간조각이 엄청나게 많은 걸 다 알면서 선택하지 않다니. 얼마나 재밌는 걸 놓치는 건데? 그 바보같은 결정을 후회하면서 사느니, 모르고 사는 게 좋을 거야. 뭐, 니가 지금 만드는 그 시간 조각도 너에겐 소중한 거니까."

 

갑자기 그가 눈앞에 나타나 서서히 다가왔다.

 

"자, 이제 너는 내가 왔었다는 사실을 이제 기억하지 못할거야. 그래도 내 이름은 기억해 줄래? 나, 피터 팬이야."

 

하고 그가 공중에 뜬 채로 내 이마에 키스했다. 모든 기억이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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