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조각글

어느 밤, 아이리시 펍

by 밀리멜리 2020. 9. 21.

반응형

아이리시 펍 (핀터레스트 이미지)

아직 해가 떠 있는 이른 저녁이지만 거리는 북적였고 가게들은 저마다 작은 조명을 밝히기 시작했다. 붉은 벽돌과 제라늄 화분 사이 흑판에 흰 분필로 적힌 낯 뜨거운 칵테일 이름들이 눈길을 끌었다.

 

여자는 가슴이 길게 패인 검은 드레스를 입고 들어왔다. 일순 펍에 있던 손님들이 여자의 드레스를 스치듯 탐닉했다. 여자는 벽난로 옆 스툴에 앉아 엘더플라워 진토닉을 주문했다. 성 축일이랍시고 쨍한 초록색 옷을 입고 기네스만 마셔대는 것 따위는 딱 질색이었다. 

 

한 모금. 라임향이 감도는 차가운 잔을 입에 가져다 대었다. 누군가 바이올린을 켰다. 또 한 모금. 뜨거운 것이 목을 타고 적시다가 확 하고 알콜향이 퍼졌다. 누군가 원목 바닥을 구둣발로 두드리며 춤을 추었다. 진토닉을 비웠다. 옆에 앉은 어느 여행객은 그녀를 보러 이 시골의 아이리시 펍에 왔다고 속삭였다. 자리에서 일어나 빈 잔을 내미니 바텐더가 아이리시 크림이 담뿍 든 커피 칵테일을 내밀었다. 제가 드리는 거예요.

 

유리잔을 들고 붉은 머리칼의 외국 사람과 한참 떠들었다. 음악 소리가 크기 때문일까 아님 외국 사람의 낯선 억양 때문일까. 뭐라고 하는지 묻혀버렸다. 다트 내기를 했다. 물론 그녀가 이겼지만 요란하게 마시멜로우로 장식한 라임 마가리타를 거절하진 않았다.

 

담배를 피우고 여자는 외국 사람의 팔에 있는 타투 글자가 무슨 뜻이냐고 물었다. 내 친구가 쓴 노래 제목이야. 아, 그 노래에 건배.

 

그리고 여자는 사랑에 빠졌다. 눈을 맞추고 어깨를 맞닿았다. 스치듯이 손을 잡고 허리를 이끌어 춤을 추었다. 검은 드레스가 꽃잎 날리듯 파르르 너풀거렸다. 목에 키스를 했고 또 춤을 추었다.

 

바텐더가 마지막 주문을 받았고 바이올린 연주는 절정으로 치달았다. 사람들이 꽉 찬 곳에서 그 둘은 주위에 아무도 없다는 듯이 키스를 했다. 여자는 한 손으로 외국 사람의 붉은 머리칼을 감싸안고 다른 손으로 팔에 새겨진 타투를 꼭 잡았다.

 

마감 시간을 넘겼다. 코트에서 담배 냄새가 났고 차가운 밤공기가 폐에 닿도록 숨을 들이켰다. 여자의 집에서 레드와인 한 병을 더 땄고 안주로 먹을 도리토스도 한 봉지 뜯었다. 흰 침대 시트에 붉은 머리칼의 냄새가 담겼고 한번도 본 적 없는 무늬를 만들어냈다. 

 

아직도 붉은 머리칼의 외국 사람은 바이올린 소리를 듣고 그 여자를 떠올린다.

 

두 여자의 완벽한 밤이었기에.

 

 

------------

 

Ed Sheeran의 Galway Girl을 듣고 상상해서 써본 글입니다.

'조각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어느 밤, 우주로의 초대장  (13) 2020.10.08
우울증에 관하여  (4) 2020.09.25
인어공주 그 후  (0) 2020.09.23
  (0) 2020.09.21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