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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글

인어공주 그 후

by 밀리멜리 2020. 9.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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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안개가 흰구름처럼 피어오른다. 인어공주는 한가롭게 꼬리로 수면을 톡톡 치면서 놀고 있었다.

 

"물거품이 되었을 때는 기분이 어땠어?"

"사르르하고, 슬픔이 사라지는 기분이었지."

"왜 슬펐는데?"

"사랑을 잃었으니까."

 

하고 꿈꾸는 듯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인어공주의 머리칼이 너울너울 흘러내렸다.

 

"아, 왕자에게 배신당했었지."

"응."

"그 왕자는 다른 여자랑 결혼했어. 복수하고 싶지 않아? 너는 칼에 맞고 거품이 되어버렸는데."

 

그 질문에 인어공주는 희미하게 웃음인지 슬픔인지 뜻 모를 표정을 지었다.

 

"아가, 내가 물거품이 되기로 한 건 내 인생 최고의 결정이었어. 그 때 나는 너무 외로웠거든. 그래서 노래를 불러 인간을 내 곁에 끌어들였어. 하지만 아무리 노래를 불러도 인간들은 대답을 해주지 않더라. 적어도, 살아있는 영혼은 대답하지 않았지. 나는 어떡해야 할지 몰랐어."

 

암초 위에서 매혹적인 노래를 부르는 로렐라이. 닻을 내리지도 않앗는데 꿈쩍도 하지 않는 큰 배. 너무도 고요한 바다. 자욱하게 낀 안개. 고된 항해로 피로한 선원들은 말 한 마디 내뱉지 못하고 숨을 거둬야 했을 것이다.

 

"그래서 물거품이 되기로 했어. 다른 영혼이 내 목소리에 대답해 주길 원했거든."

"그래서 그 다음은? 누가 대답해 준거야?"

"수없이 많은 영혼들이."

"영혼?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 왕자가 너를 물거품으로 만들었는데. 너무하잖아."

 

"수 세기 동안, 나는 모험가로 대륙을 떠돌기도 하고, 밀을 갈아서 빵을 만들기도 했지. 신도들을 거느린 제사장으로 예식을 하기도 하고. 어느 때는 은둔자가 되어 그림만 그린 적도 있어. 병에 걸려 죽어도 보고, 물에 빠져 죽기도 했단다. 여왕이 되어 한 나라를 다스리기도 했고, 디바가 되어 무대에서 열광적인 환호를 받는 짜릿함을 느껴 보기도 했지. 그렇게 재밌는 삶을 살았는데, 나를 사랑하지 않은 인간 하나가 대수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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