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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트리올 생활/공무원 이야기

이민자 간호사들과 함께한 즐거운 대화

by 밀리멜리 2023. 11.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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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업 마지막 날, 노조에서 받은 빵을 따뜻하게 구워먹으려고 나디아가 일하는 산부인과 병동에서 나디아와 점심을 먹었다. 산부인과 병동 휴게실에는 빵빵한 전자레인지와 냉장고, 토스터가 있어서 좋다. 휴게실에 들어서니, 점심을 먹고 있는 간호사들이 있었다.

 

"안녕! 어서 와, 피켓팅 하고 온 거야? 다 끝났어?"

"아니, 잠깐 빵 좀 먹으려고 들어왔어. 비서들은 4시간동안 피켓팅 해. 그래도 행진하고 오니까 재밌네."

"아, 간호사들은 1~2시간만 하니까 우리는 아침에 다 끝났어. 추워서 얼굴이 빨개졌네! 여기 앉아서 빵 구워 먹어!"

"하하, 몸 좀 녹여야겠어."

 

 

간호사들과는 지나가며 몇 번 인사한 게 전부라 함께 뭘 먹는 건 처음이다. 나는 쭈뼛거리면서 자리에 앉았다. 처음 이야기하는 사이인데도 모두 반말을 한다. 그래도 나는 말을 꺼내기가 어색해서 잠시 테이블만 보다가, 간호사 커스텀 텀블러를 발견했다.

 

"이 물통 진짜 재밌다! 

 

 

물통에 간호사 영양성분표가 붙어 있었다. 공감력 1000%에 수면은 0%, 용기 500%, 인내심 100%와 희생 300%, 카페인 110%!

 

"재밌지? 간호사 협회에서 준 거야. 내 이름도 써 있어."

 

한번 말을 트고 나니 개인적인 이야기가 막 나왔다.

 

"나는 여덟살 때 칠레에서 퀘벡으로 이민왔거든. 그땐 이민자가 정말 없었어! 나 혼자서 라틴아메리카 사람이고, 모두 프랑스어하는 백인들 뿐이었어. 우리 부모님도 스페인어만 하고 프랑스어를 못 해서, 부모님이 병원에 가야 할 때는 내가 학교를 결석하고 통역하러 갔어야 했어."

"아, 그랬구나."

"어느 날은 그렇게 통역하러 병원에 갔는데, 병원에서 어떤 사람이 우리 아빠를 보고 '에뻬'라고 하는 거야."

"우우우우!"

"세상에!"

"저런! 에뻬가 무슨 뜻인지 알아? 원래는 두껍다는 뜻이지만 사람한테 쓰면 멍청하다는 속어야."

"그래! 나뿐만 아니라 우리 아빠를 욕한 거잖아? 30년 전 일이긴 하지만, 인종차별이 그땐 심했어. 얼마나 열이 받던지."

 

칠레 출신의 간호사가 하는 말에 다른 간호사가 공감하며 듣는다.

 

"난 그런 것까진 겪어보진 않았지만... 난 알제리 사람이고 남편은 프랑스 사람에 흑인이라 겪은 일이 많았지."

"너 유럽에서 온 줄 알았는데?"

"아빠가 이탈리아 사람이고 엄마는 프랑스와 알제리 혼혈이이야. 다 섞였지!"

"오, 여기 있는 사람들 모두 이민자야? 너도 이민 1세대 맞아? 모국어가 뭐야?"

"난 한국어야."

"아, 그러면 다들 프랑스어 배우는 게 어려운 걸 알겠네. 그치?"

"맞아, 맞아! 사실 지금도 너희 하는 말 어려워, 하하."

"우리가 말이 넘 빨라서 그래. 이민 1세대는 어렵지만 아이들은 프랑스어 정말 쉽게 배워."

"그래, 우리 막내도 프랑스어만 하고 아랍어는 못 해."

"웃긴 게 뭔지 알아? 내가 어렸을 땐 프랑스어 못 해서 그런 인종차별을 겪었는데, 우리 애가 어느 날 학교에서 오더니 영어가 어렵다고 하지 뭐야. 그러면서 '여기는 퀘벡이니까 프랑스어를 해야지!' 이 말을 하는 거 있지! 우리 애가!"

 

그 말에 다들 깔깔거리고 웃었다. '여기는 퀘벡이니 프랑스어를 해야지'는 보통 퀘벡 토박이들이 입버릇처럼 하는 유명한 말인데, 프랑스어를 어려워하는 이민자가 들으면 괜히 주눅이 드는 말이다. 그런데 이민자의 아이가 그 말을 하니 웃길 수밖에 없었다.

 

또, 나디아가 비서 일을 하기 전에는 화학 엔지니어였다는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너 여기 오기 전에는 화학 엔지니어였다고? 너는 영어 선생님이었고? 너무 고스펙 아니야?! 이것 봐, 이민자들은 너무 실력이 좋다니까."

"여기 있는 사람들 모두 이민자니까 우리도 뭉쳐야겠다! 이민자를 위하여!"

 

이민자 간호사들과 함께 한 재밌는 식사시간이었다. 퀘벡 사람들은 이런 개인적인 이야기를 거의 털어놓는 편이 아니다. 다들 친절하며 가벼운 수다를 떨기는 쉽지만 정작 깊은 속내는 드러내지 않아서, 퀘벡 사람들을 보고 복숭아 같다고 한다. 복숭아는 겉은 말랑하지만 씨는 엄청 딱딱해서 깰 수가 없으니 말이다.

 

그런데 이민자들은 첫만남에서부터 이런 깊은 이야기를 꺼내다니, 정말 다르긴 다르다. 그러고 보니 퀘벡 동료들과는 거의 2년을 알고 지냈는데도 어린 시절 이야기나 자신이 상처받은 이야기 등은 들어본 적이 없다. (아니면 했었지만 내가 못 알아들은 걸지도 모른다) 아무튼, 같은 이민자로 연대감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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