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스라이팅이란?
뉴스나 미디어에서 들어본 적이 있겠지만, 가스라이팅(gaslighting)은 상대방의 정신상태나 논리적 판단을 의심하게 만들어 심리적으로 타인을 통제하고 조종하는 것을 의미한다.
1930년대 연극 '가스라이트'에서 유래한 심리학 용어로서, 영화화되어 더 유명해졌다. 이 영화에서는 남편이 위층에서 가스등을 켜고 물건을 훔치는데, 그럴 때마다 아내가 있는 아래층에서는 가스등이 침침해지고 뒤적거리는 소리가 난다. 아내가 그걸 지적하자 남편은 아내가 과민 반응한다며, 어떻게 마음이 꼬였길래 그런 생각을 하냐고 윽박지른다.
그레고리: 당신 머릿속을 들여다 볼 수만 있으면 좋겠어. 어떻게 하면 그렇게 꼬이고 정신 나간 생각을 할 수가 있는지.
폴라: 내가 미쳤다는 말인가요?
이 영화가 다크하고 끔찍해 보이지만, 가스라이팅은 비단 부부나 연인 사이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친구 사이나 부모 자식, 직장 내 상하관계에서도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며, 특히 사이비 교주나 독재자들이 자신의 위치를 유지하기 위해 가스라이팅을 사용한다.
디즈니 애니메이션 <라푼젤>의 마녀 고델과 라푼젤의 사이에서도 이 가스라이팅이 두드러진다. 고델은 라푼젤에게 계속 거짓말을 하며, 쓸모없다느니, 제대로 하는 일이 없다느니 하며 그녀를 비하하고 과소평가한다.
이 가스라이팅이라는 말이 실제 학계에서 쓰이는 심리학 용어인지, 아니면 그저 인터넷에서 유행하는 정보인지 궁금했다. Pscychology Today라는 심리학 저널의 Stephanie Moulton Sarkis 박사가 가스라이팅과 그 행동방식에 대해 잘 설명하고 있다. 그녀의 칼럼을 보면, 마녀 고델의 행동과 말이 가스라이팅을 나타내는 걸 잘 알 수 있다. (www.psychologytoday.com/us/blog/here-there-and-everywhere/201701/11-warning-signs-gaslighting)
마녀 고델의 테마곡, <Mother Knows Best>는 그 자체로 가스라이팅으로 가득 차 있다.
마녀 고델의 거짓말과 인신공격
고델은 바깥 세상은 위험으로 가득차 있고, 안전하게 지내기 위해서 탑에서만 살아야 한다고 겁을 준다. 고델은 그런 위험을 과대하게 포장하고, 라푼젤이 떠나지 못하도록 한다. 깡패, 폭력배, 포이즌 아이비, 유사 구덩이, 육식동물, 뱀, 전염병까지... 음, 전염병은 사실이긴 하다. <라푼젤>의 배경이 코로나 왕국이라는 걸 생각하면 좀 소름이 돋기까지 하다.
아무튼, 사람이 18살이 될 때까지 그런 게 무서워서 한 번도 밖에 못 나간다는 건 너무나도 큰 과장이고 터무니없는 거짓말이다. 게다가 더 악질인 것은, 라푼젤을 진정시키기 위해서 "네가 좀 더 크고 똑똑해지면 밖에 나가도 돼"라고 말해놓고는 그 말을 번복해 버린다는 점이다.
가스라이팅의 또 다른 특징은 상대방을 교묘하게 공격해 자존감을 낮춘다는 점이다. 특히나 상대방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특징을 잘 알고 있고, 이를 공격하면 상대방이 쉽게 무너진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 장면에서 고델은 전신 거울을 가져와 라푼젤의 외모를 지적한다. 옷차림이 너저분하고 엉성하며, 살이 통통하게 쪄버릴 거라고 말한다. 외모뿐 아니라 성격은 덤벙대고, 순진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잘 속고, 멍청해서 판단력이 좋지 않다고 말한다.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데도 말이다.
가스라이팅은 비난으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 다정한 말로 아껴주고 칭찬하기 때문에 피해자는 더욱더 혼란스러워진다. 고델은 라푼젤을 납치한 후 양육하며 어머니인 척 하지만, 사실 고델은 라푼젤의 머리칼에 깃든 마력에만 관심이 있다. 고델이 영생과 젊음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라푼젤의 머리카락 덕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델은 라푼젤에게 키스할 때도 꼭 머리카락에 키스하며, 그녀의 머리카락을 정성스럽게 빗어주는 등의 행동을 한다. 고델이 라푼젤에게 하는 좋은 말은 머리카락뿐이며, 라푼젤의 머리칼만이 고델에게 도움이 되는 유일한 특징이기 때문에 이를 칭찬한다. 반면에, 라푼젤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유진은 라푼젤의 머리카락을 얼굴에서 치우려고 한다.
실제로 나를 별로 좋아하는 것 같지 않은 누군가가 "넌 다른 건 별론데 이거 하나는 잘하더라!", "다른 건 몰라도 이거 하나만큼은 잘했으면 좋겠어"라는 칭찬을 한다면 주의하자. 우선 그러한 칭찬이 그 사람에게 개인적으로 이득이 되는지 잘 관찰해야 한다. 만약 낌새가 이상하다면, 그 사람을 멀리하는 것이 좋다.
피해자에게 미치는 영향
이렇게 거짓말에 거짓말, 인신공격과 비웃음이 쌓이다 보면 피해자는 그 말을 믿게 되고, 자신의 가치를 스스로 떨어뜨리게 되며, 현실을 의심하게 된다. 더욱이 가스라이팅이 칭찬과 비난이 뒤섞여 있기 때문에, 피해자는 혼란스러워지고, 그 혼란스러움은 자기 의심을 더욱 증폭시킨다.
일례로, 라푼젤이 등불 축제를 보러 가고 싶다고 하자, 고델은 "아, 반짝거리는 별을 말하는 거니?"하며 알면서도 모른 척한다. 라푼젤은 등불을 말했지만 고델이 그걸 일부러 다른 식으로 해석하는데, 이 때문에 라푼젤은 혼란스러워하고, 자신의 판단을 더욱 믿을 수 없어한다.
라푼젤이 처음으로 탑 밖으로 나오자,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불안하고 혼란스러워하는 모습을 보인다.
심리학자의 조언
실제로 이러한 상황이 벌어진다면, 심리학자들은 그런 관계를 계속해서 유지해야 할지 잘 판단하라는 조언을 준다. 물론, 가스라이팅은 상대방을 의존적으로 만들어 관계를 끊어내기 어렵게 만들기 때문에 그러한 판단을 하는 것 자체가 쉽지 않다. 가스라이팅을 하는 사람들은 "나 아니면 네가 어떻게 살아가겠니?", "넌 나 없이 아무것도 못해."라는 생각을 주입하기 때문에 상대방 입장에서 관계를 끊어내는 것은 무척 두려운 일일 수도 있다.
그럴수록 그 관계에서 잠시 거리를 두고, 자신이 그 관계에서 떠나게 되면 어떻게 지내며, 그 삶이 어떠할지를 관찰하라고 충고한다.
라푼젤의 행동이 이러한 관계에서 벗어나는 좋은 모범이 되고 있다. 라푼젤이 처음 탑을 나왔을 때는 물론 혼란스러워 하고 자기 자신을 의심하고 괴로워한다. 그러나 점점 시간이 갈수록 세상을 통찰력 있게 바라보고, 결국에는 감추었던 진실을 발견하고 마녀 고델에게 용감하게 맞선다.
라푼젤은 자신이 코로나 왕국의 잃어버린 공주인 것을 알게 되고, 자신의 목소리로 당당하게 고델에게 진실을 요구한다. 그 장면에서 라푼젤이 "내가 바로 납치되었던 공주예요. 제가 웅얼거렸나요?"하고 묻는데, 이 장면이 과연 압권이다.
이전에 고델이 "말 웅얼거리지 마라. 너 그럴 때마다 정말 짜증나더라. 그냥 너 놀리는 거야, 귀여운 것."라고 말한 바가 있기 때문에, 진실을 요구하며 또박또박한 목소리로 웅얼거리냐고 되묻는 것은 라푼젤이 가스라이팅을 더 이상 진실로 받아들이지 않으며, 이제 의존적이고 해로운 관계에서 벗어났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른 사람들, 다른 친구들을 만나며 다른 의견을 들어보도록 노력해야 한다. 라푼젤이 유진과 다른 마을 사람들을 만나 노래했듯이, 외부 의견과 자기 자신의 판단이 좋은 시너지를 이루었을 때 자기 자신을 회복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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