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천에서 용 날 수 있나?
우리가 사회 계층 이동을 바라보는 시선은 많이 변한 것 같다. 예전에는 개천에서 용 날 수 있고, 아메리칸 드림은 가능하며, 자수성가한 사람들의 자서전을 읽고 존경하기도 했다. 하지만 정말 개인의 노력으로 계층을 상승시키는 사회 이동(Upward Mobility)은 가능한가?
'흙수저', '헬조선'이라는 단어를 만들어낸 요즘 세대는 그것이 쉽지 않다고 대답한다. 글쎄, 옛날에는 죽어라 공부하면 성공했을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아닌 것 같아요. 대학까지 나왔지만 대기업 입사는 너무 힘들고, 어렵사리 취업을 한다 해도 이건 양반집 노예가 된 것 뿐이지 성공이 아니에요. 사회 전반에 허탈감과 '될 대로 돼라'는 N포세대의 절망감이 가득하다.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김난도 교수의 힐링 조언이 닿지 않는 이유는 간단하다. 아픔을 극복하고 나서 오는 보상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열정 페이를 받고 전문 기술을 배워서 추후에 내 힘으로 성장할 수 있다면 그 열정페이를 비난할 이유가 없다. 대학에 수천만원의 학비를 바쳤는데, 그까짓 거 돈 조금 받고 더 배울 수 있다면 뭐 어떨까. 그 말처럼 정말 젊을 때 잠깐 아프면 뭐 어때. 하지만 열정 페이를 받고 열정적인 노동 뒤에 돌아오는 대가는 물경력 뿐이다.
빈곤에 대한 편견
이런 N포 세대의 절망감은 과도한 성과주의, 즉 메리토크라시(Meritocracy)에서 비롯한다. 서점마다 넘쳐나는 베스트셀러 자기계발서는 말 그대로 자기를 계발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적당히 대충 일해서는 성공할 수 없고, 남들보다 특별히 뛰어난 능력이 있어야 부를 얻을 수 있다는 조언은 아무래도 뭔가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는 것 같다.
베스트셀러인 <부의 추월차선>에서는 생각없이 죽도록 일해서는 절대 부자가 될 수 없고, 남들과는 다른 시도를 하고 위험을 감수해야 부의 추월차선을 타서 큰 성공을 이룰 수 있다고 말한다. 그 말이 맞다. 이 책은 사람들을 생산자, 혁신자로 변모시킬 동기 요인을 주고, 생각의 전환으로 부자가 될 수 있다고 북돋아 주는 좋은 경제 서적이다.
하지만 슬픈 사실은 저자가 말하는 부의 추월차선을 타지 않으면 중산층에도 머물 수 없다는 패배감에 있다. 아무 생각 없이 일하는 사람은 정말 빈곤에서 벗어날 수 없나? 이 글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도 많을 테지만, 이 책을 읽고 있노라면 이런 메시지를 보낸다는 생각이 든다. 넌 이런 혁신적인 생각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가난한 거야. 평범하다는 건 노예라는 뜻이거든.
영화 <기생충>의 구조적 불평등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은 특히나 이러한 구조적 불평등을 잘 보여주고 있다. 기생충은 정말 잘 만든 영화여서 여러 메시지가 있고 해석할 거리가 넘쳐나지만, 특히나 빈곤에 대한 편견을 깨 주고 있어서 속이 시원하다.
1. 일할 의지가 있다.
가난한 가족인 이들은 어떻게든 피자집 사장을 설득해 일을 구하려고 한다. 가난하다고 해서 게으른 것이 아니다. 일하기 싫어서 돈을 못 버는 것이 아니다. 특히나 서구권에서는 복지 급여로 먹고사는 사람들은 일하려고 하지도 않고 돈만 받으려 한다는 편견이 있다. 한국 사람들은 정말 부지런해서 이런 편견이 덜한 편이지만, 기초수급자에 대한 편견은 분명 존재한다.
편견보다 더 큰 문제는 이들이 일을 구해도 불안정한 삶을 벗어날 수가 없다는 점이다. 정해진 시간만큼 무슨 일이든 노동을 하면 어느 정도 보상을 받아야 하지 않겠는가? 정당한 노동으로도 빈곤을 벗어날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은 어쩔 수 없이 '기생충'이 될 수밖에 없는가 보다.
2. 재능이 있는 가족들
"기정이가 그렇게 손재주가 좋다며? 포토샵도 잘하고."
"넌 이 좋은 실력으로 왜 미대를 떨어지냐?"
능력이 부족한 것도 아니다. 좋은 대학을 나오지 못했다고 해서 재능이 없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 재능이 사기 치는 것으로 발전해서 아쉬울 뿐이다.
위 장면처럼 기정은 포토샵 실력도 뛰어나고 미술심리치료 글을 몇 개 읽고 나서 그 지식을 실생활에 적용하는 훌륭한 재능을 가지고 있다. '썰을 몇 개 본' 정도의 지식으로 포장하는 능력이 좋으니, 대기업 마케팅 부에서도 홍보의 귀재가 되었을 수도 있겠고, 정식으로 미술치료 교육을 받았다면 저명한 심리학자가 되었을 수도 있겠다 싶을 정도이다.
기정이가 어떻게 ADHD 낌새가 보이는 천방지축 다송이를 잘 다뤄서 꾸벅 인사를 하도록 만들었는지 모르겠지만, 기정이 같은 선생님이 있다면 요즘 TV에 나오는 '금쪽같은 내새끼' 프로그램에 오은영 선생님처럼 출연했을지도 모른다.
아버지 기택은 안 해본 사업이 없다. 치킨 프랜차이즈도 창업했고, 대만 카스테라점도 창업했다. 기정이 미대를 지망하고 기우가 4수를 할 정도로 어느 정도 넉넉한 집안이었지만, 이들이 가난하게 된 것이 게으르고 무식해서 그런 것은 아니다.
어머니 충숙 또한 전국 육상대회에서 상을 받은 훌륭한 스포츠 선수이지만, 그 재능을 펼칠 길이 없다.
3. 감히 네가, 계층 이동을 하겠다고?
이 영화에서 '선'을 넘는다는 표현은 굉장히 자주 나오고 상징적이다. 사생활을 존중한다는 의미일 수도 있지만, 선을 넘는다는 것은 계층 간의 간극선을 넘는다는 의미도 된다. 즉 선을 넘으면, 신분 상승이 가능하고 중산층이나 부유층으로 진입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기존 부유층들이 새롭게 떠오르는 신흥 부유층을 좋아할 리 없다. 부유층들은 자신의 부와 권력을 이용해 '적당히 일해서는 부자가 될 수 없는 사회구조'를 더욱 단단히 만들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구조적 불평등이 계속되는 이유일 것이다.
기생충이 2020 아카데미 오스카 수상을 받았다는 소식에, 트럼프가 이를 조롱한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하다. 트럼프는 한국과의 무역 관계가 좋지 않은데 한국에 상을 준다느니 하는 국제 관계 핑계를 댔지만 그의 속은 영화 속 박사장과 다르지 않다.
네티즌들은 "트럼프가 기생충처럼 훌륭한 영화를 이해할 리 없다"라고 말하지만, 그는 누구보다도 이 영화를 잘 이해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구조적 불평등을 공고히 해야 하는 입장에서, 그 사회 구조를 비판하는 영화의 아카데미 수상 소식은 당연히 그에게 '선을 넘는' 행동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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