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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트리올 생활

내가 보고 겪은 몬트리올의 트랜스젠더 문화

by 밀리멜리 2021. 4.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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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가 정치적인 문제에 비교적 리버럴한 편이긴 하지만, 몬트리올은 도시 특성상 성소수자 문화가 특히 크게 오픈되어 있다. 사실 다른 캐나다 도시를 가본 적이 없어 잘 모르지만, 몬트리올은 확실히 오픈되어 있다.

 

이런 문화 속에 살다 보니 캐나다 배우 엘렌 페이지가 성전환을 해서 엘리엇 페이지로 이름을 바꿨다는 소식은 그렇게 놀랍지 않았다. 엄브렐러 아카데미에서 맡았던 바냐 역할이 어떻게 바뀌고 설명될지 궁금하긴 하다. 

 

성전환 수술을 하고 엘렌 페이지에서 엘리엇 페이지로 이름을 바꾸었다.

그렇지만 한국에서 오랫동안 살아왔으니 이런 문화를 직접 경험했던 첫 일년간은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가장 처음 트랜스젠더를 봤던 기억은 슈퍼마켓에서였다. 햄 코너에서 뭘 고를까 구경하고 있는데, 어떤 5살 정도 되어보이는 아기가 부모에게 샌드위치에 넣을 햄을 사달라고 조르고 있었다.

 

"햄 사주면 안 돼? 도시락에 넣고, 샌드위치에도 넣고..."

"그럼 딱 두개만 사자. 네가 골라봐."

 

라고 엄마인 듯한 고운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

 

"그럼 이 햄 살까? 저번에 맛있었어..."

 

하고 고사리같은 손이 햄을 집어가는데, 너무 귀여워서 옆을 보니 아이를 데리고 있는 건 캡모자를 푹 눌러쓴 아저씨였다! 

 

깜짝 놀라서 다시 눈을 돌리고 진정했다. 내가 목소리를 잘못 들은 건가? 분명 남자처럼 보이는데... 목소리는 여자야?

 

"그것도 넣고, 하나만 더 골라서 카트에 넣자."

 

하고 타이르는 가녀린 목소리는 아무래도 여자였다. 근데 옆에 있는 사람은 겉보기엔 남자였는데... 나는 내가 잘못본 게 아닌가 싶어 실례가 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한번 더 보았다. 아이를 한번 더 다시 보고, 아버지인 듯한 사람을 다시 봤지만 다른 사람은 없었다.

 

 

 

 

가장 놀라웠던 것은 청소년도 성전환을 한다는 것이었다. 어떻게 그런 어린 나이에 그런 큰 결정을 하는지 놀랍기만 하다. 실제로 그런 아이들을 성전환 청소년(des ados transgenres)이라고 부르며, 아이들을 위한 심리치료나 클리닉도 활성화되어 있다. 

 

성전환 청소년 (출처: 라디오 캐나다)

그래서 누군가를 부를 때 대명사를 쓰기가 애매하다. 어떤 사람을 가리킬 때 he를 써야하는지, she를 써야하는지 혼동스러울 때가 종종 있고, 무엇보다도 겉모습만 보고 속단해서는 안된다. 이곳에서는 호칭 문제가 꽤 예민한 문제이기도 하다. 그래서 자신의 성 정체성을 굳이 밝히고 싶어하지 않는 사람들도 많고, 한 명임에도 불구하고 they나 them으로 불러달라는 사람들도 많다. 

 

 

 

오늘도 서류를 프린트하러 복사가게에 갔는데, 그곳에서 일하는 학생이 가녀린 여성처럼 보였다. 허리까지 오는 긴 생머리에 체형이 마르고 여리여리했기 때문이다. 복사를 하려는데, 종이가 없다는 문구가 뜨길래 그 학생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여기 프린트에 종이가 없다고 나오는데, 종이 좀 넣어주실래요?"

"잠깐만 기다리세요. 제가 곧 보러 갈게요."

 

라고 대답하는 굵직한 남자 목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이제는 너무 익숙해진지라 그냥 '아, 여자가 아니라 남자였구나' 하고 놀라지도 않았다. 다만 그 학생을 여성 호칭인 '맴(Ma'em)'이나 '마담(Madame)'이라고 부르지 않길 잘했다고 생각할 뿐이다.

 

그 학생이 내 자리로 와서 모니터 화면을 보더니 말했다.

 

"음, 레터 사이즈가 아니라 A4가 필요한거네요. 레터 사이즈로 프린트 해줄래요?"

"그렇게 하고 싶은데, 사이즈가 고정되어 있네요. 꼭 이 사이즈로 프린트 해야 해요."

"그럼 기다리세요. 사장님께 부탁드릴게요."

 

하고 가게 안으로 총총 사라졌다. 사장님이 나와서 지금은 A4 사이즈가 없으니 잘라주겠다고 말했다. 단 두 장의 페이지를 위해 직접 큰 종이를 잘라주다니, 정말 친절했다.

 

 

이곳 사람들이 이런 문화를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이유는 아마 직업에 성 구별이 크게 없는 것 덕분일지도 모른다. 공사장 인부나 경비, 경찰 등의 직업군에도 여자가 많고, 화장품 판매, 유치원 선생님, 간호사 등의 직업군에도 남자가 많다. 무엇보다도 이력서에 성별을 기재하지 않고, 사진도 붙이지 않는 것이 에티켓이다. 꼭 신상정보를 적어야 하는 때에도 성별란에는 "여자/남자/밝히고 싶지 않음/기타" 등등 여러 선택지가 있다. 그러니 트랜스젠더라고 해서 직업 구할 때 어려움이 없고, 이로 인한 차별이 발생한다면 비난을 받게 된다.

 

아무튼 이런 문화를 인터넷에서만 보고, 듣다가 직접 만나고 대화하다 보니 쉽게 익숙해진다. 무엇보다도 개인의 선택을 존중하고 이해하는 법을 배우게 되었다. 한국에서는 굉장히 충격적일 수도 있는 문화인데, 이제 점점 아무렇지도 않게 느껴지는 것이 신기하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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