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몬트리올 생활

새 자전거를 사러 간 날 - 기어 없는 자전거

by 밀리멜리 2021. 5. 26.

반응형

봄이 되자마자 자전거를 사겠다고 마음먹었지만,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다. 사야지 사야지 하다가 구글에서 리뷰가 좋은 자전거 가게를 검색해놓고, 다음에 가야지 하고 마음만 먹었다. 사실, 자전거를 사는 걸 미룰 수밖에 없었다. 보통 때라면 자전거로 넘쳐날 대형 마트에도 탈 만한 자전거가 별로 없었고, 가격도 무척 비쌌다. 2년 전이라면 튼튼한 자전거를 적당한 가격에 살 수 있었을 텐데, 지금은 가게를 둘러봐도 새 자전거가 거의 없다. 

 

주말에는 자주 유대인지구에 있는 마트에서 장을 보고 돌아오는데, 검색해서 찜해놓았던 자전거 가게가 문을 열었길래 아무 준비없이 들어가서 자전거를 구경했다. 

 

리뷰가 좋은 자전거가게

사미르라고 자신을 소개한 주인은 무척 친절했다.

 

"안녕하세요! 자전거 하나 찾고 있는데요!"

"널 위한 자전거? 어서 와."

 

자전거 주인과 나는 처음 만난 사이이지만 반말로 대화를 했다. 이곳에서는 직장 상사한테도 반말을 하고(물론 사전 동의를 구해야 하지만), 대학 교수님도 존대말로 부르면 오히려 불쾌해하며 '내가 그렇게 늙어 보이냐'라는 말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교수님이나 직장 상사처럼 위계질서가 확실히 있는 경우에는 '반말해도 될까요'라고 물은 후 말을 놓지만, 길거리에서 만난 사람들끼리는 친근하게 반말을 한다.

 

사미르가 널 위한 자전거(un vélo pour toi)라고 말한 건 물론 '내 키에 맞고 도시에서 타고 다닐 만한 자전거'라는 뜻이었겠지만, 그 말이 꼭 마음에 들었다. 마치 해리 포터가 올리밴더 가게에 가서 딱 맞는 마법지팡이를 맞추듯 나에게 딱 맞는 자전거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가게 안은 별로 크지 않았는데, 수리 중인 자전거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어 움직이기가 힘들 정도였다. 가게 한 구석벽에 걸려있는 새 자전거가 7개 정도 있었다. 

 

"여기 있는 게 새 자전거야. 나머지는 다 수리중인 다른 고객 자전거라서 팔 수가 없어."

 

"자전거 수리 및 판매"

수리 중인 자전거가 얼마나 많았던지! 요즘은 자전거를 새로 사는 사람보다 고쳐서 타는 사람이 더 많아졌다고 한다. 사미르는 자전거 수리와 판매를 하는 자신의 직업을 사랑하고 열정이 있는 사람이었다. 

 

"오늘은 일요일이라 원래 쉬는데, 자전거 수리 주문이 너무 많아서 일하고 있었어."

"어쩐지! 일요일 휴일인걸 알고 있었는데, 지나가다가 문이 열려 있길래 들어왔어. 원래 이 앞 슈퍼에 장을 보러 왔거든."

"아, 장 보러 왔었구나. 사실 지금이 제일 바빠. 날이 따뜻해지고 5월이 되면 주문이 엄청 많거든. 힘들긴 하지만 겨울에는 문 닫고 푹 쉴 수 있어서 좋아. 5개월 넘게 쉴 수 있거든." 

"그거 다행이네."

 

"여기 있는 자전거가 새거야. 그런데 저건 너무 크고, 이 까만 자전거가 괜찮겠는데. 자전거 내려줄게, 한번 봐."

 

새 자전거

깔끔한 블랙 프레임에 심플한 자전거였다. 보자마자 "와, 예쁘다"라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이건 요즘 유행하는 심플한 자전거야. 불필요한 기능을 깔끔하게 빼고 단순하게 나왔어."

"정말 기어가 없네? 기어가 없어도 언덕길 다닐 때 괜찮을까?"

"뭐, 자전거 타고 몽루아얄 산에 올라가는 것만 아니면 괜찮아. 도시 안에서 다닐거지? 그럼 괜찮아. 그리고 이 자전거는 오른쪽에만 브레이크가 있어. 이게 불편하다면 나중에 다시 와. 내가 왼쪽 브레이크를 달아줄게."

"자전거가 너무 예쁜데, 안전할까 걱정인데..."

"며칠만 타보면 익숙해질 거야. 오히려 기어가 없으니 잔고장이 없어서 수리할 일도 없고, 타이어 바람만 잘 넣으면 되거든. 새 자전거 중에는 마땅한 게 없네. 요즘 물건이 없어서 난리거든... 이거 이외에는 너무 큰 자전거만 남았어. 아니면 100만원 넘는 특수용 자전거들이고. 이 자전거가 마음에 안들면 위층으로 와. 중고 자전거도 있으니까."

 

그러다가 사미르는 위층에서 보라색 낡은 자전거를 꺼내주었다. 

 

"한번 타고 와. 중고 자전거는 타봐도 되거든. 내가 안장만 조정해 줄게."

 

고맙다고 말하고 보라색 자전거를 받았다. 정말 오래되었는지 프레임은 온통 붉은 녹이 슬었고 안장은 이미 뜯어져 너덜너덜했다. 예쁜 새 자전거보다 디자인도 투박해서 조금 실망했다.

 

그러나 이 보라색 자전거는 탔을 때 비로소 진가가 드러났다. 자전거가 너무 안정적이고 편한 것이 아닌가!

 

오래되었다는 느낌은 있지만 브레이크와 기어를 새로 갈았고, 너덜너덜한 안장은 오래된 만큼 정말 푹신했다. 몬트리올은 도로에 구멍이 많은데, 그런 울퉁불퉁한 도로를 달리더라도 하나도 아프지 않을 것 같고, 절대 넘어지지 않을 것같은 안정감이 있었다.

 

"이 자전거 정말 좋네! 너무 편하고 튼튼해."

"그렇지? 내 자랑이야. 내가 수리한 자전거라 그래."

"이건 얼마인데?"

"175달러."

 

175달러...? 가격을 듣자 고민이 되었다. 새 자전거는 500달러였고, 중고 자전거는 175달러였다. 중고 자전거도 비싸지다니! 2년 전엔 이 가격으로 좀 더 좋은 중고자전거를 살 수 있었는데, 정말 인플레이션이 있긴 있나 보다.

 

새 자전거는 타볼 수가 없어서 편할지 아닐지 알 수가 없었다. 기어가 없고 브레이크도 하나여서 걱정이 되었지만 사미르는 요즘 오히려 심플하고 기능이 없는 자전거가 인기를 얻고 있다고 했다.

 

중고 자전거는 편하지만 디자인이 구식이고 페인트가 다 벗겨졌으며 핸들은 녹슬어서 아예 붉은색이었다. 디자인이냐 편함이냐, 무엇을 선택할까... 디자인만으로 자전거를 선택하는 게 현명할까?

 

"뭘 선택해야 할지 모르겠네. 중고자전거는 튼튼하고, 새 자전거는 너무... 예뻐."

"마음 가는 대로 해야지. 너 이미 사랑에 빠진 것 같은데? 중고가 튼튼하지만, 좋아하는 걸 선택해야지 어쩌겠어."

"사미르라면 뭘 선택할 거야?"

"더 좋아하는 거. 그건 어쩔 수 없어." 

 

뭔가 수수께끼같은 대화를 하고, 결국 선택한 것은 예쁜 새 자전거였다. 

 

돌아오는 길에는 꽤 높은 언덕이 있는데, 기어 없는 자전거를 타니 허벅지에 힘이 더 들긴 하지만 정말 익숙해지면 괜찮을 것 같았다. 브레이크가 한쪽만 있는 것도 곧 적응이 되었다.

 

무엇보다도 내 키에 딱 맞춰 고정되어 있는 게 정말 편했다. 신호등 때문에 멈출 때도 편했고, 다시 출발하는 것도 편했다. 지금까지 나는 내 키에 맞지 않은 자전거를 탔던 거였는지도 모르겠다. 보라색 중고 자전거도 괜찮았겠지만, 새 자전거도 정말 괜찮았다. 

 

디자인 때문에 고르긴 했지만, 다른 사람 눈에도 이 자전거가 예뻐 보였는지 돌아오는 길에 "Nice bike!"라는 칭찬을 많이 들었다. 하핫, 참 감사합니다. 저도 새 자전거를 사서 신나요.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