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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미생활

나의 고베 여행기 - 히메지 성에서 만난 일본 친구 유카

by 밀리멜리 2021. 9.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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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메지 역에서 내리자, 눈에 들어오는 것은 우습게도 지하철역 안의 빵집이었다. 아니, 눈에 들어오는 게 아니라 코로 먼저 그 빵집 냄새를 맡았는지도 모르겠다. 이때가 오전 10시 정도였는데, 빵집에서 흘러나오는 고소한 빵 냄새가 아침 일찍 길을 나선 여행객을 유혹했다. 결국 패스츄리 하나를 사서 나왔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빵집 투어만 하는 것도 좋지 않을까

히메지 역에서는 안내소를 찾을 필요도 없었다. 그냥 히메지 역에서 바로 나서니, 저 멀리 하얀 히메지 성이 보였다. 그냥 직진으로 걸어가면 되겠군. 

 

히메지는 중소도시라, 오사카 같은 대도시와는 조금 달랐다. 아치형으로 지붕을 만든 아케이드 상점가가 무척 많았고, 무엇보다도 사람들이 별로 없어서 한적하게 걸을 수 있었다. 복작복작한 곳에서 사람들을 피하며 다니다가 조용한 곳에 오니 마음까지 편해졌다. 관광지라서 원래 사람이 많을 터인데, 어쩐 일인지 그날은 현지인만 드문드문 보이고 관광객이 없어 보였다.

 

히메지 시 풍경

"어른 하나 주세요."

 

히메지 성 앞에서 표를 끊고 들어가니 안내판이 보였다. 이상하게도 관광객이 거의 없었고, 붉은 점퍼를 입은 단발머리의 여자가 내 앞에서 걷고 있었다.

 

안내판에는 "순방향"이라는 글이 적혀 있었다. 순방향? 순방향이 무슨 뜻이야? 역방향의 반대말인가? 어쨌든 이 길로 가면 되겠지... '순방향'이라는 글자는 좀 지겨울 정도로 자주 나타났다. 알겠어, 알겠어! 이 방향으로 갈게.

 

아무튼 그 순방향 길이 유일한 길이었고, 중간에 다른 곳으로 빠질 수도 없었다. 앞서 가는 빨간 점퍼의 단발머리 여자와 나는 어색하게 거리를 둔 채 함께 성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히메지 성은 겉면은 예뻤지만 속은 공사중이었다

히메지 성은 아직 복원 공사가 한창이었다. 목조 건물의 골자가 다 드러나 있었고, 군데군데 공사용 파란 비닐로 감싸져 있어서 흉물스러웠다. 히메지 성의 겉모습은 예쁘고 하얀데, 안쪽은 파란 비닐이 덕지덕지 붙여 있으니 조금 실망스러웠다. 아마 공사 중이어서 관광객이 없었던 모양이다. 그래도 이왕 왔으니 끝까지 구경을 해봐야겠지.

 

성 안으로 들어서니 신발 그림에 금지 표시가 되어 있었고, 신발 겉에 씌울 비닐신발이 마련되어 있었다. 흠, 여기서부터는 신발을 벗어야 하는 건가... 신발 금지 표시판에 쓰인 한자를 가만히 노려보고 있자니, 함께 순방향 길을 걸어온 그 단발머리 여자가 나에게 일본어로 말을 건다.

 

"여기서부터는 그 비닐을 신고 들어가야 해요."

"아, 고마워요."

 

하더니 내가 비닐신발을 신는 것을 기다려 주는 것이 아닌가. 이 비닐 신발을 계기로 나는 이 여자와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한국 사람이에요?"

"네."

"와, 잘됐다! 내 이름은 유카라고 해요."

"유카? 너무 예쁜 이름이네요."

"고마워요. 한국 사람 만나서 너무 좋네요! 나 한국 좋아해요. 한번 가봤거든요."

"정말요? 어딜 가봤어요?"

 

만나자마자 친구가 되어버렸다

처음 보는 사이에다가 내 일본어는 엄청 어색했는데도, 우리는 오래된 친구처럼 쉬지 않고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자기 이름을 유카라고 소개한 그녀는 한국 아이돌을 좋아한다며 소녀처럼 까르르 웃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케이팝을 잘 몰라서 적당히 맞장구를 쳐주었다.

 

"어떤 그룹을 좋아해요?"

"에또, 수-파 쥬니아또, 비꾸방구!"

"비꾸방구...? 아, 빅뱅!"

 

그때는 BTS가 데뷔하기도 전이어서, 자세히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는 흐릿하게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하지만 유카가 일본어 특유의 악센트로 빅뱅을 "비꾸방구!"라고 말한 것만은 확실히 기억한다. 처음엔 어느 그룹을 말하는지 몰라서 갸우뚱했지만... 비꾸방구라니, 재밌었다.

 

"아, 나는 일본 만화 좋아해요!"

"어떤 만화 좋아하는데요?"

"음... 원피스도 있고, 나루토도 봤고, 미야자키 하야오 애니메도 좋아하는데... 너무 많아서 이야기하지 못할 정도예요!"

"그럼, 가장 최근에 본 게 뭐예요?"

"스킵 비트라는 만화예요."

"에엣-?"

"순정만화인데, 가수가 되고 싶은 여자 이야기예요. 그런데 몇십 권을 읽어도 고백을 안 하더라니까요!"

"아, 얏빠리(역시) 모르겠는데..."

 

일본인은 일본 만화를 모르고, 한국인은 한국 노래를 모르는 웃긴 상황.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쉬지 않고 이야기를 했다. 이야기가 너무 재미있어서 히메지 성을 다 돌았는지도 모를 정도였다. 유카가 하는 이야기를 백퍼센트 다 알아듣진 못했지만, 유카는 친절하게 가이드를 해주었다.

 

"여기는 공주의 방이에요. 저기 전시된 붉은 옷이 공주가 입었던 기모노래요."

"오, 예쁘다. 공주 방은 성 가장 안쪽에 있네요."

 

공주의 방에는 기모노가 전시되어 있었다

 

성 밖을 나오니 어느 우물가에 표지판이 세워져 있었는데, 유카가 그걸 읽더니 나에게 말했다.

 

"여기는 사무라이들이 할복했던 곳이에요."

"할복...?! 할복이 뭐예요?"

 

할복이라는 단어를 몰라서 물어보니, 유카가 "으윽!" 하며 칼로 배를 가르는 시늉을 한다. 그제야 나는 "오오..." 하며, 유카의 실감 나는 연기에 감탄을 했다. 유카가 없었더라면 이런 건 알 수 없었을 터였다. 진짜 사무라이들이 할복을 하긴 했구나!! 

 

히메지 성을 다 둘러보고 우리는 헤어지기 아쉬워서 우리는 그 옆의 예쁜 일본식 정원까지 둘러보기로 했다. 

 

"우리 이 정원도 둘러봐요. 여기 예뻐요."

"좋아요. 그런데, 저 히메지 성 티켓만 샀어요. 티켓을 사야 하니 잠깐 기다려 줘요."

 

원래 히메지 성 티켓과 코코엔 정원 티켓을 함께 사면 더 싼데, 새로 만난 일본 친구와 이렇게 헤어지기 아쉬워서 티켓을 따로 더 샀다. 정원을 둘러보면서도 우리는 계속 수다를 떨었다.

 

"지금 이 시간에 왜 여기에 온 거예요?"

"나는 원래 이곳 히메지 시에서 태어나서 살았고, 여기서 일해요. 사실 오늘 회사 땡땡이치고 온 거예요! 마음이 답답할 때면 자주 히메지 성에 오거든요! 아직 회사 사람들 아무도 내가 여기 왔는 줄 모를걸요?"

 

유카는 오늘 마음이 답답했던 모양이다.

 

"배고프지 않아요? 밥 먹을래요?"

"그래요! 마침 배고프던 참인데..."

 

우리는 히메지 역 근처의 아케이드 상점가로 들어갔다. 유카가 어느 식당 앞 간판에서 메밀국수 사진을 보며 물었다.

 

"소바 좋아해요?"

"당연하죠. 여기서 먹을까요? 원래 아는 식당이에요?"

"아뇨, 나도 처음이에요! 한번 먹어봐요!"

 

우리는 아무도 없는 식당 한쪽 구석에 앉았고, 돈까스와 메밀국수 셋트 두 개를 시켰다.

 

맛있었냐고? 아니, 맛은 정말 최악이었다. 국물을 한 숟갈 들이켰더니 소금맛만 난다. 면을 먹어봐도 너무너무 짜다. 솔직히 이렇게 맛없는 메밀국수는 처음 먹어본다.

 

"맛이 어때요?"

"아... 소금이 너무 많아요."

 

일본 음식은 대체로 내 입맛에 너무 짰다

 

'짜다'라는 일본어를 몰라서, '소금이 많다'라는 말을 썼다. 나는 돈까스 몇 개만 집어먹고 국수는 남겼다. 그리고 화장실에 다녀왔는데, 그 사이에 유카가 점심값을 대신 내주었다.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다! 처음 만난 누군가가 밥을 사주다니... 솔직하게 짜다고 말한 게 미안할 정도였다. 너무 고맙기도 하고, 여행지에서만 느낄 수 있는 낯선 친절함에 감동해서 국수를 다 먹지도 못했다다는 사실은 까맣게 잊어버릴 정도였다.

 

친절한 여행 가이드에 밥까지 사주다니... 당신은 천사??

 

"점심값 대신 내준 거예요? 너무 고마워요! 그러지 않아도 되는데..."

"내가 오자고 했으니 내가 내는 건 당연하죠. 친구 만나서 너무 좋네요. 난 이제 다시 회사에 돌아가 봐야 해요. 당신은 어디로 가요?"

"이제 아라시야마 온천에 가보려고요."

"아, 온천 좋죠. 나도 함께 가고 싶다. 회사 더 땡땡이치고."

"하하, 같이 가면 안돼요?"

"그러고 싶지만 난 히메지에 남아야죠. 오후엔 일해야 하니까."

"나중에 연락하고 싶은데, 어떻게 하죠?"

"메-루를 알려줄게요."

 

하고 유카가 종이에 뭔가를 적어주었다. 메-루라니, 이메일이겠지? 한국에 돌아가서 인터넷을 다시 쓸 수 있으면, 이메일을 보내면 될 터였다. 

 

유카는 히메지 역까지 들어가서 열차를 타는 나를 배웅해 주었다. 이날은 어쩐 일인지, 참 많은 사람들이 나를 도와주었다. 나는 유카가 손을 흔드는 모습을 계속 보려고 열차 맨 앞칸 창문가에 자리를 잡았다. 

 

안녕!

 

하지만 아쉽게도 그 이후로 유카와 연락을 할 수는 없었다. 유카가 준 쪽지를 보니 이메일주소가 아니라 복잡한 번호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일본어로 메-루는 이메일이 아닌 그냥 문자 메시지였고, 한국에서 일본 전화번호로 연락을 할 수가 없었다. 쪽지에 적힌 번호로 어떻게든 연락 방도를 찾으려고 노력했지만, 번번이 실패하고 말았다. 

 

스마트폰이 이제 막 나오기 시작한 때여서, 일본 사람들도 대부분 스마트폰이 없었고 유카는 집에 컴퓨터조차 없다고 말했다. 요즘 만났더라면 당연히 연락을 할 수 있었을 텐데.

 

그래서 내 기억에만 남아있는 히메지 시의 친구 유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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