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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쳐리뷰/책 리뷰

오은영의 화해를 읽고 생각난 학생 한 명

by 밀리멜리 2021. 12.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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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학원에서 처음 강사일을 시작할 때였다. 아이들을 대한 지 오래되어서 어색하면 어떡하나, 만약 고집이 세거나 선생님을 무시하는 문제학생을 만나면 어쩌나 걱정부터 앞섰다. 사실 많이 경험해보는 것이 제일 좋은 방법이지만 그전에 뭔가 도움이 될 만한 것이 없나 자료도 뒤적거려 보았다.

 

그러다 우연히 오은영 선생님이 나온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 옛날 방송을 정주행하기 시작했다. 방송이 재밌기도 했고, 내가 배울 건 없나 싶어서 꼼꼼히 살폈다. 운이 좋았는지 내가 맡는 아이들은 모두 순해서,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에 나올 만큼의 문제 학생을 만난 적이 없다.

 

정말 열심히 봤던 우아달

 

그러던 어느 날, 한 아이가 입을 꼭 닫고 수업거부를 했다. 학원차를 타고 학원에 오긴 왔지만, 단어시험이나 수업 듣는 걸 모두 거부했다. 원장님과 담임선생님, 학부모가 모두 달려들어 아이를 설득하려고 노력했다. 그 아이는 계속 입을 닫고 있다가 나에게만 이야기를 하겠다고, 나를 불러달라고 말했다고 한다.

 

나한테만 이야기하겠다니, 왜일까? 나에게 뭔가 섭섭한 점이라도 있었을까? 그건 아닌 것 같았다. 오히려 나 혼자 유일하게 그 아이의 신뢰를 얻은 것 같아 조금은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 나는 학원에서 유일하게 아이들에게 윽박지르지 않아서 천사쌤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상황이 공교롭게도 나는 그날 하루종일 수업이 있었다. 쉬는 시간은 고작 5분이었고, 나는 정신없이 교실과 교실을 돌아다니며 수업하다가 겨우 짧게 시간을 내어 그 아이와 이야기했다.

 

"무슨 일이야, 쌤한테 말하고 싶은 거 있어?"

"......"

 

나한테만 이야기하고 싶다던 그 아이는 막상 내가 나타나도 쉽게 입을 떼지 못했다. 나는 교실에 가르치던 아이들을 그대로 둔 것이 생각나 급박하게 아이를 보챘다.

 

"나한테 하고 싶은 말 있어서 부른 거 아니야? 지금 수업 중인데."

"......"

"아무 말도 안 하면 나도 도와줄 수가 없어."

 

 

조금 더 기다렸더니 아이는 결국 입을 열었다. 아이의 주장은 간단했다. "공부하기 싫다, 수업 듣기 싫고 단어시험도 보기 싫다, 스트레스도 많이 받고 학원 그만두고 싶다"가 주 요지였다. 

 

나는 스트레스받는 그 입장은 이해하지만, 학원에 고용된 입장에서 '학원 쉬어라'라는 말은 할 수 없었다. 나는 무슨 말을 해주어야 할지 몰라서 "그렇구나. 선생님이 원장 선생님 부모님하고 이야기해 볼게."하고 그 말을 그대로 전달하고는 바로 수업에 들어갔다. 아이는 학원을 몇 달 쉬기로 했다.

 

만약 다른 말을 해줄 수 있었더라면?

 


<오은영의 화해>를 읽다가 이 에피소드가 기억이 났다. 다시 똑같은 상황에 처한다면 그 아이에게 무슨 말을 해줄 수 있을까?

 

'금쪽같은 내새끼'를 자주 보고 나서 깨달은 것이 하나 있다. '마음을 물어보고 감정을 알아주는 게 중요하다는 것.' 아이들뿐만 아니라, 누구나 자기의 마음을 알아주길 원하는 법이니까. 

 

오은영의 화해

 

아마 마음을 보살펴 주는 말을 했더라면 어땠을까? '공부할 게 너무 많아서 힘들었구나.', '시험 보는 게 부담스러웠구나', '학원에 와서 수업 들어가기 싫을 정도로 힘들었구나.' 

 

이런저런 말을 생각해 본다. 물론 결과는 크게 바뀌지 않았을 테지만, 그 아이에게 있어서 학원을 쉬었던 기억이 나쁜 기억으로만 남지 않고, 이해와 공감을 받았던 기억으로 남았을 것이다.

 

사람은 공부를 잘해야만, 좋은 대학에 들어가야지만 사랑받는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가 남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것은 그 사람의 지위, 학력, 물질적인 것 때문이 아니에요. 사람은 그 자체로 가치 있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존중하는 겁니다. 
오은영. 화해. 

 

또 하나, 공부에 관해서도 새로운 관점을 얻었다. "배운다는 것은 실력을 늘리는 것이지 점수를 의미하진 않는다." 점수가 안 나올 때는 실수를 했는지, 모르는 것이 있었는지 알아본다. 실수는 줄이면 되고 모르는 것은 배우면 된다. 이 공부 철학이 모두에게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수학 점수는 기억나지 않지만, 밤늦도록 도서관에 앉아 간식으로 끼니를 때우며 공부하던 기억은 생생하다. 결국 남는 건 시험 점수 그 자체가 아니라, 좋은 점수를 받기 위해 여러 모로 고민하고 노력했던 기억이라는 것이 인상 깊게 남는다.

 

실패하고, 좌절감에 부딪혔을 때 어떻게 극복했는지, 다음에는 실패하지 않기 위해 어떤 방법을 고민했는지, 하기 싫은 것을 꾹 참고 얼마나 열심히 해냈는지를 잘 기억하는 것이 백 점짜리 시험지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 시험 점수가 세상의 전부인 줄 알았던 학창 시절에 읽었더라면 더 좋았을 것 같다. 하지만 지금이라도 알게 된 게 다행이다. 뭐, 나쁘지 않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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