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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쳐리뷰/책 리뷰

여행자와 달빛 독후감 - 신혼여행에서 헤어진 부부

by 밀리멜리 2024. 1.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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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르브 엔텔의 여행자와 달빛이라는 책을 읽었다. 미국 여행을 준비하면서 뭘 읽을까 책을 고르다가 '여행자'라는 제목에 끌려 고른 책이다. 여행 내내 책은 펼쳐보지도 않다가 돌아오는 공항에서 비행기를 기다리며 처음 펼친 책이다. 여행을 마무리하기에 좋은 책이었다.


 
헝가리 사람인 미하이는 부인 에르지와 함께 신혼여행으로 이탈리아를 방문한다. 둘은 부다페스트의 부유한 상류층으로, 화려한 이탈리아 일주 여행을 시작한다. 베네치아에서 며칠 꿈같은 나날을 보내지만, 이탈리아의 시골마을을 구경하며 긴 여행에 지쳐간다. 그러다 미하이는 어느 광장의 카페에서 옛 친구와 마주치고, 와인을 마시며 자신의 학창 시절을 회상한다. 그의 학창 시절 이야기가 마음에 들지 않은 에르지는 로마로 가는 기차 안에서 은근히 싸우기 시작한다. 
 
누군가와 함께 여행하다가 싸워본 적 있으신지? 낯선 여행지에서 싸우는 것은 익숙한 곳에서 싸우는 것과 사뭇 다르다. 상대방과 싸우다가 더 이상 함께 여행할 수 없다고 생각되면 따로 코스를 짜고 혼자서 길을 가야 한다. 미하이와 에르지도 이탈리아의 어느 시골 기차역에서 서로 갈라진다. 둘은 각자 여행을 시작하는데, 결국 이 신혼부부가 이혼을 하는지 아닌지는 스포일러 방지로 남겨두도록 하겠다.
 
둘이 여행에서 갈라지는 장면은 이렇다.

기차는 테론톨라라는 역에 닿았다.

"여기 내려서 커피를 한 잔 마실게."
"내리지 마. 당신은 이탈리아인이 아니야. 게다가 열차는 금방 떠날 거야."
"떠난다니 무슨 말을. 모든 역에서 십 분간 정차한다고. 그럼, 안녕!"
"바보 같고 짓궂기만 한 당신도 안녕! 나중에 편지는 써."

미하이는 내려서 커피를 주문했다. 에스프레소 기계에서 황홀하고 뜨거운 커피가 방울마다 쉭쉭거리며 떨어지는 동안, 그는 같이 내린 현지인 한 명과 페루자의 명소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그리고 커피 한 잔을 모두 비웠다.

"빨리 와요. 기차가 벌써 떠나고 있어요." 현지인이 말했다.

열차를 타려고 그들이 막 달려왔을 때, 열차는 이미 반쯤 역을 벗어나고 있었다. 겨우 마지막 칸을 붙잡고 열차에 올랐다.그 칸은 구식의 삼등 객차였는데, 복도는 없었고 모든 칸막이 방이 별개의 세상이었다.

"이건 급행열차예요. 페루자까지는 정차하지 않아요."

여행자와 달빛. 세르브 언털.

 
미하이는 로마로 가는 열차가 아닌, 페루자로 가는 열차를 잘못 탄 것이다. 잠시 에르지는 어떻게 하지 생각하다, 지갑에서 수표를 발견하고 혼자서 여행을 하기로 결심한다.

 


 
둘이 싸우게 된 계기는 무엇일까?
 
여러 가지가 있지만, 다 읽고 나서 돌아보니 주인공 미하이가 항상 망설이고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데 있지 않나 싶다. 미하이는 싫어도 싫은 척 못하고, 우유부단하며, 참고 참다가 견디지 못하게 될 때쯤에는 도망가 버리는 인물이다. 여행이 끝나갈 즈음, 그는 학창 시절과 이루지 못한 첫사랑 생각에 빠져버리게 된다. 잘못된 열차를 타고 나서 부인에게 돌아가지 않은 것은, 옛 첫사랑도 생각났겠다, 현실에서 다 도망쳐버리고 싶은 마음 때문이 아닐까.

 

그리고 또 하나는 이유는 에르지의 돈이다. 돈 문제는 부부가 겪는 흔한 갈등이지만, 에르지가 부르주아인 덕에 여러 아침드라마급 막장 이야기가 전개되어서 에르지 쪽 이야기가 은근 읽는 재미가 있다. 에르지는 시아버지가 경영하는 회사에 자금을 대는 투자자로, 에르지의 돈이 없다면 미하이가 물려받을 회사는 파산할 위기에 처해있다.

 

아무튼 미하이는 에르지의 전남편으로부터 장문의 편지를 받게 되는데, 그 편지를 짧게 요약하면 "너는 돈이 나만큼 없어서 에르지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을지 모르겠다. 돈 필요하면 연락해라."라는 자존심 긁는 내용이었다. 미하이는 그 편지를 읽고 자괴감에 빠져 전남편이 자기보다는 훨씬 나을거라며 괴로워한다. 

 


 
에르지와 헤어지고 난 뒤, 미하이는 혼자만의 여행을 계속한다. 고독감이 찾아온다.

고독은 어쨌든 피할 수 없는 것, 운명과 그 기다림에 해당하는 것, 로마에서 다룬 유일한 것, 그리고 그 누구와도 공유할 수 없는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이 지긋지긋하고 몽환적인 기다림과 상실감 속에서 침몰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이제서야 알게 되었다.

 
 
돈이 다 떨어지고, 길에서 자는 날이 계속되어도 그는 부다페스트로 돌아가기를 거부한다. 그는 학창시절과 첫사랑 에버를 떠올리며 죽음이라는 생각에 깊이 빠진다. 그는 점점 쇠약해지고, 결국엔 어느 산길에서 쓰러져 버린다.
 
어느 병원에서 눈을 뜬 미하이는 며칠 내내 아무것도 하지 않으며 누워 지낸다. 그를 정성껏 보살피는 의사에게 말한다.

"무엇이 문제인지 저는 알고 있어요." 엘슬리에게 말했다. "저는 과거에 대한 동경을 극심하게 앓고 있어요. 청년 시절로 돌아가고 싶어요.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약이 있을까요?"

 
미하이는 학창시절을 왜 그리도 그리워했을까? 아마 여행을 하며 학창시절로 돌아가면 현실을 잊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돈이 떨어져도 옛날 친구들을 하나하나 만나며 미하이는 어떻게든 꾸역꾸역 무위의 생활을 이어나간다. 죽음에 대한 생각은 점점 강해져 가고, 그는 그토록 그리워했던 첫사랑 에버를 만난다.
 
하지만 에버가 자신에게 올 일은 없다는 걸 알게 되고, 미하이는 절망에 차 자기가 죽을 때 곁에 있어달라는 부탁을 한다. 어떤 것도 바라지 않고 이것만 해달라는 말에 에버는 승낙한다.
 
어느 날 미하이는 이탈리아의 낯선 마을에서 죽을 결심을 하고 에버에게 연락을 하지만, 저녁에 보러 가겠다는 그녀의 무심한 답장을 듣고 놀란다. 죽음의 낭만에 취해있던 미하이의 정신이 확 깬다. 짝사랑했던 에버가 자기가 죽는다는대도 별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니... 갑자기, 죽음에 대한 공포가 밀려온다.
 

토요일 오후였다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어떻게 보낼 것인지에 대해 미하이는 심각한 질문들과 마주했다. 이미 그 어떤 것에도 의미가 없을 때 인간은 무엇을 할까?

 
 
바로 그 때, 미하이는 어떤 사랑스럽고 엉뚱한 우연과 마주친다. 아기의 영세식에 참여해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특별하고 신기한 음식을 맛본다. 그 환상적인 경험으로부터 미하이는 자기가 결국 무엇을 원하는지 돌아보게 되고, 자기 마음 속 공포의 근원은 사실 허구였다는 걸 깨닫게 된다. 미하이는 부다페스트로 귀국하는 열차 안에서, 토스카나의 산등성이를 바라보며 살아남아야겠다고 다짐한다.
 
에르지와 미하이 모두, 각자의 여행에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찾게 된다. 여행이 좋은 점은 자신을 더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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