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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쳐리뷰/책 리뷰

책 추천 - 프레드 울만, 동급생

by 밀리멜리 2020. 12.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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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문장의 반전과 충격으로 유명한 명작, 프레드 울만의 <동급생>을 읽었다. 청소년기의 순수하고 열정적인 우정을 그린 이 작품은 페이지가 그리 많지 않은 얇은 책이다. 

 

 조금 빽빽한 문장들, 엄청난 반전

 

 

책이 그렇게 두껍지 않지만, 페이지를 쉽게 넘기기가 힘들었다. 읽다가도 내가 무슨 내용을 읽고 있나 싶어서 다시 되돌아간 적도 몇 번이나 있었다. 번역의 문제는 아닌 것 같고, 이 책에 담긴 독일의 지리, 역사, 시대적 배경이 생소하기 때문인 것 같다. 결국엔 문장이 조금 빽빽하다는 느낌이 들고, 페이지가 잘 넘어가지 않는다. 책이 얇아서 금방 읽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오산이었다.

 

"그때 나는 슈투트가르트에 있던, 마르틴 루터가 신성로마제국 황제이자 스페인 왕 카를 5세 앞에 섰던 해인 1521년에 설립되었고 뷔르템베르크에서 가장 이름 높은 학교인 카를 알렉산더 김나지움에 있었다."

프레드 울만, 동급생. 열린 책들.

 

이 문장을 읽을 땐, 결국 자기네 학교 자랑을 하는 건지 한참 나중에 깨달았다. 하지만 이런 빽빽한 문장들도 주인공의 특성과 어우러져 재미를 더하는 요소가 된다.

 

무엇보다, 마지막 문장 하나만을 위해서라도 그 밀도 있는 문장들을 읽을 가치가 있다. 조금 참고 읽다 보면 마지막에 꼭 보상을 받을 수 있는 책이다.

 

 

 고대 그리스 덕후의 친구 자랑

 

주인공 한스는 유대인답게 정말 똑똑하다. 그저 조용했을 뿐이지, 문학과 예술 지식을 줄줄 읊고 다니는 아이들을 유치하게 생각할 정도로 지식이 깊다. 열일곱에 괴테나 셰익스피어쯤은 줄줄 번역해내고, 결국에는 스물 다섯의 나이에 변호사가 될 정도로 지적이다. "유태인은 똑똑하다"라는 고정관념을 더욱더 단단히 만들어 주시는 주인공이시다.

 

한스는 취미가 고대 그리스 주화 수집일 정도로 엄청난 고대 그리스 로마 시대 덕후이다. 그래서인지 상황 묘사를 할 때마다 고대 그리스 레퍼런스가 많다. 크로이소스처럼 부자라느니,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나 한니발이나 카이사르의 행적만큼이나 잘 알고 있다느니 하는 소리를 해대며 독자들을 당황시킨다. 지적 허영도 꽤나 있는 편이다. 이런 문장들 때문에 글이 좀 잘 안읽히지만, 그것도 주인공의 특징이라 생각하면 재미있게 느껴진다.

 

그런 주인공 앞에 정말 독일 귀족 혈통의 우아하며 지적인 친구가 전학을 온다. 그들이 처음 만나는 장면을 인용한다.

 

"모두의 눈길이 파이드로스가 소크라테스를 따르듯 그를 따라 들어온 낯선 아이에게 향하고 있어서였다. 우리는 마치 유령을 보기라도 한 것처럼 그를 쳐다보았다. 무엇보다도 나를, 그리고 아마도 우리 모두를 기죽게 한 것은 그의 자신만만한 태도보다도, 귀족적인 분위기보다도, 은근슬쩍 젠체하는 미소보다도, 그의 우아함이었다."

프레드 울만, <동급생>. 열린책들.

 

주인공 한스가 콘라딘 폰 호엔펠스라는 소년에게 얼마나 홀딱 반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파이드로스가 소크라테스를 따른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그리고 한스가 그런 그리스 철학에 심취해 있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알면 이 책이 더욱 재미있게 느껴질 것이다.

 

플라톤이 저술한 <파이드로스>는 고대 그리스 철학자 소크라테스와 파이드로스가 나눈 대화를 책으로 펴낸 것이다. 그들은 산책하다가 우연히 만나, 가장 이상적인 사랑은 무엇이며, 참된 에로스란 무엇인가 하는 등의 사랑 담론을 펼친다. 소크라테스는 서양 철학사에 근본을 제공한 존경받는 철학자이니, 그와 만나 철학적 담론을 펼치는 것은 정말 영광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특히 경험과 지식을 청년들에게 물려주며 사랑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사랑이라고 보았으니, 파이드로스가 소크라테스를 보는 눈빛을 상상해 보자면 이글이글 타오르는 정열과 선망의 눈빛이었을 것이다. 그리스 철학에 빠진 한스가 그런 눈빛으로 친구를 바라보며 우아하다고 찬양하는 것은, 어쩌면 정말 사랑에 가까운 우정일지도 모르겠다.

 

"정교하게 새겨진 조각상 같은 그 아이의 당당한 얼굴을 세세히 눈여겨보고 있던 나에 비한다면, 실로 그 어떤 연인도 트로이의 헬레네를 더 열심히 주시할 수는 없었을 터였다."

프레드 울만, <동급생>. 열린책들.

 

이 문장이 정말 압권이다. 한스가 콘라딘을 보는 눈빛이 정말 장난 아니다. 그리스 신화 속 인간계 최고의 미녀, 헬레네를 쳐다보는 것보다 더 열렬히 쳐다봤다고 하니, 친구 자랑이 정말 과한거 아닌가 싶어 웃음이 날 정도다. 콘라딘은 아마도 전학 첫날부터 한스가 자길 우러러본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헬레네와 파리스의 사랑>. 이렇게 바라봤다구요?

 

이 유태인 소년 한스와 콘라딘의 우정이 깊어진다. 콘라딘도 한스 못지않게 지적인 친구여서, 둘은 만나서 같이 시낭송을 한다든지, 철학에 대해 토론하며, 종교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고, 독일인인 그들이 가끔은 프랑스어로 대화하기도 한다. 

 

한스의 친구 자랑은 어쨌든 조금 과해서 재미있을 정도이지만, 그가 열일곱 살이라는 걸 생각해 보면 그럴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청소년기에 누구나 정말 멋지고 대단한 친구를 선망한 적이 있을 테니, 한스의 이런 자랑은 더욱 더 이해가 간다. 정치나 어른들의 세계는 나몰라라 한 채로 자신들만의 이야기를 꾸려나가는 우정 이야기, 정말 멋있잖아?

 

문제는 그들의 우정이 꽃핀 시기가 1932년 2월, 나치 독일이 집권하기 직전이라는 점이다. 나치즘이라는 시대의 흐름이 독일 순수 귀족 소년과 유태인 소년을 덮쳤을 때, 그들의 우정이 정말 몇십년이 지난 뒤에도 <내가 그를 위해 기꺼이 죽을 수 있는 친구>로 남을 수 있을 것인가?

 

 반전이 걸작인 소설

 

이 책의 리뷰를 검색해 보면, 마지막 문장에서 보여지는 충격적인 반전 결말에 압도당했다는 이야기가 가득하다. 부디 이 포스팅에서 너무 큰 스포일러를 주지 않았기를 바라며, 이 책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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