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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쳐리뷰/책 리뷰

조선시대 한글 편지와 유씨 부인의 조침문

by 밀리멜리 2020. 12.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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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대전시 유성구에 있던 안정 나씨 문중의 분묘를 이장하던 때 한 여인의 목관에서 편지가 발견되었다고 한다.

 

군관의 한글편지

이 편지를 쓴 사람은 1490년 경에 살던 나신걸이라는 사람이다. 한글이 창제된 것이 1443년이라는 걸 생각하면, 대략 50년 만에 평민들이 자유롭게 한글을 썼다 생각하니 참 놀랍다. 한글을 '언문'이라고도 했는데, 그 말이 참 맞는 것이 이 편지글을 읽어보면 그 당시 어투가 들리는 것 같아 참 신기하다.

 

“논밭은 다 소작을 주고 농사짓지 마소. 내 철릭 보내소. 안에다 입세. 봇논(洑) 모래 든 데에 가래질하여 소작 주고 절대 종의 말 듣고 농사짓지 마소. 내 헌 비단 철릭은 기새(인명)에게 주소. 그 옷을 복경이(인명)한테 입혀 보내네. 가래질할 때 기새 보고 도우라 하소. 가래질을 다하고 순원이(인명)는 내어 보내소. 부리지 마소. 꼭 데려다 이르소. (중략). 내 삼베 철릭이랑 모시 철릭이랑 성한 것으로 가리어 다 보내소. 분과 바늘 여섯을 사서 보내네. 집에도 다녀가지 못하니 이런 민망한 일이 어디에 있을까. 울고 가네. 어머니와 아기를 모시고 잘 계시오. 내년 가을에 나오고자 하네. (중략).

안부가 몹시 궁금해 계속 쓰네. 집에 가서 어머님이랑 아기랑 다 반가이 보고 가고자 했는데, 장수가 자기 혼자만 집에 가고 나는 못 가게 해서 다녀가지 못하네. 이런 민망하고 서러운 일이 어디에 있을까? 군관에 자원하면 내 마음대로 하지 못한다네. 가지 말라고 하는 것을 구태여 가면 병조에서 회덕골(집)로 사람을 보내 잡아다가 귀양 보낸다 하니, 이런 민망한 일이 어디에 있을까. 아니 가려 하다가 마지못해 함경도 경성으로 군관이 되어 가네. (중략).

논밭의 온갖 세납은 형님께 내어달라 하소. 공물은 박충의댁에 가서 미리 말해 바꾸어 두소. 쌀도 찧어다가 두소. 고을에서 오는 모든 부역은 가을에 정실이(인명)에게 자세히 차려서 받아 처리하라 하소. 녹송이(인명)가 슬기로우니 물어보아 모든 부역을 녹송이가 맡아서 처리하라 하소. 녹송이가 고을에 가서 뛰어다녀 보라 하소. 쉬이 바치게 부탁하라 하소.”

 

이 편지에는 '나신걸의 아내 신창맹씨'라고 쓰여 있어, 나신걸이라는 군관이 자신의 아내 신창맹 씨에게 보낸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나신걸은 이때 조선시대 군관으로서, 갑자기 먼 함경도 종성으로 전근을 가게 된다. 

 

나신걸이라는 인물은 원래 농부인 듯 하다. 조선시대에는 16세부터 60세의 모든 양인이 군역을 졌으니, 한참 농사를 잘 짓다가도 자기 차례가 오면 어쩔 수 없이 군역을 져야 했던 것이다. 지금이나 옛날이나 군대 가면 편지가 빠질 수 없다. 우리 부모님도, 나도 내 동생도 다 겪은 일이고 그 편지들이 아직도 남아 있는데, 500년 후에 그 편지들이 발견되면 정말 재미있을 것 같다. 

 

나신걸의 아내 사랑이 참으로 절절하다. 추운 곳으로 군대를 가니 옷을 보내달라는 말과 함께, 아내에게 절대로 혼자 농사를 짓지 말고 소작을 주라고 단단히 당부를 한다. 노비 문제나, 공물, 세금 납부 등등 아내가 혼자 처리해야 할 일이 걱정되어 누구에게 부탁해야 할지를 자세하게 알려준다.

 

마음 같아서는 나신걸 자신이 직접 가서 다 처리하고 싶을 테지만, 집에 가지 못하도록 하는 상관이 원망스럽기만 하다. 그래놓고 상관 자신은 집에 가버렸다! 나신걸이 느꼈을 배신감이 어땠을지... 

 

그러면서도 아내를 위해 값비싼 분과 바늘을 사서 보내는 로맨티스트적인 모습을 보인다. 바늘은 당시 중국에서나 겨우 구할 수 있는 귀한 물건이었다고 한다. 하급 무관인 나신걸은 아내에게 보낼 선물을 사기 위해 정말 월급을 탈탈 털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보다 400년 후에 나온 고전 작품인 유씨 부인의 '조침문'에서도 바늘이 귀하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연전(年前)에 우리 시삼촌(媤三村)께옵서 동지상사(冬至上使) 낙점(落點)을 무르와, 북경(北京)을 다녀 오신 후에, 바늘 여러 쌈을 주시거늘, 친정(親庭)과 원근 일가(遠近一家)에게 보내고, 비복(婢僕)들도 쌈쌈이 나눠 주고, 그 중에 너를 택(擇)하여 손에 익히고 익히어 지금까지 해포 되었더니, 슬프다, 연분(緣分)이 비상(非常)하여, 너희를 무수(無數)히 잃고 부러뜨렸으되, 오직 너 하나를 연구(年久)히 보전(保全)하니, 비록 무심(無心)한 물건(物件)이나 어찌 사랑스럽고 미혹(迷惑)지 아니하리오. 아깝고 불쌍하며, 또한 섭섭하도다.

유씨부인, 조침문.

 

조침문이 1800년대의 작품이라는 걸 생각하면, 몇백 년 후에도 바늘이 여전히 비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유씨부인의 시삼촌이 동지상사인데, 동지상사는 조선시대 동짓달에 보내는 사신들 중의 우두머리를 의미한다.

 

조선시대 사신들이 조선의 특산품을 가지고 황제를 만나 선물을 주고 받는 상황을 생각하면, 사신들은 현 시대의 외교관이나 마찬가지인 것 같다. '낙점'은 이품 이상의 관리를 선발할 때 그 이름 위에 점을 찍는다는 의미이다. 세자의 아들이나 대제학 정도가 이품 벼슬이었다. 그 사신들의 우두머리이니, 유씨 부인의 시삼촌은 정말 높은 관리였던 것 같다.

 

전통 양식의 바늘쌈 노리개 (이미지출처: 더단장)

바늘 하나 부러졌다고 제문을 읊는 것이 그렇게 과장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유씨 부인은 가문 좋은 집안으로 시집왔지만, 아이도 낳기 전에 그녀의 남편은 일찍 죽었고, 그녀가 먹고 살 방법은 바느질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고마운 바늘이 끊어졌으니, 정말 안타까울 만하다.

 

며칠 전 올린 포스팅에서 이북 리더기를 잃어버려 안타깝다는 소식을 적었는데, 아빠가 그 포스팅을 보시고 조침문이 생각난다며 맘이 아팠다는 메시지를 보내주셨다. 조금 부끄럽기도 하지만 그 마음만으로 너무 따뜻해져서 고마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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