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오후, 철학 토론 모임에 갔다.
친구도 사귀고 싶었고, 뭐 아무 말이나 그럴듯하게 하면 그게 철학 아닌가 싶어서.
영어 연습도 할 겸, 그냥 해보자는 마음으로 참석했다.
이번 주제는 epistemology, 인식론이었다.
처음엔 무슨 말인지 몰라서 검색해봤다. ‘지식에 대한 학문’이라고.
음… 내가 준비한 이야기는 뭔가 좀 비껴간 느낌이었지만, 그래도 일단 3분 동안 주절주절 떠들어봤다.
"우리 앞에 비스킷이 있는데 이게 비스킷인지 어떻게 아는 걸까요? 모든 물체는 분자로, 분자는 원자로 이루어져 있다고 하잖아요. 원자는 거의 대부분 비어있다고 하는데 그럼 이게 어떻게 내가 아는 비스킷이죠? 제 생각엔 오감을 사용한다고 생각합니다. 보고, 맛보고, 냄새맡고, 듣고, 만지고요. 그런데 오감도 정확하진 않죠, 사람마다 다르잖아요. 그래서 제 6의 감각을 사용한다고 생각해요. 우리의 감정이나 생각, 직관 같은 걸 말이죠."
버벅거렸지만 내 말에 고개를 끄덕여주는 사람들이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두번째 발언도 했다.
"루이종 씨가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는 다 알지 못해요. 기억도 불완전하죠. 그게 무섭다는 것도 이해가 갑니다. 하지만 여울 씨가 말한 것처럼 우리의 기억과 지식을 보강해주는 도구가 있지 않을까요? 기록하고 써보면 기억력에 도움이 된다는 말에 공감합니다. 우리는 완전하지 않고, 그래서 더 나아지고 싶어하고, 그렇기 때문에 오늘 우리 여기에 모여서 epistemology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 아닐까요?"
내가 할 말에만 집중하느라 다른 사람이 뭐라고 하는지는 못알아들었다.
뭐, 괜찮다. 아마 다들 자기 이야기 하느라 바빴을 테니까. 토론이라는 게 원래 그런 거지.
토론이 끝나고는 자유롭게 떠들었다.
"나는 러시아에서 왔어요. 아직 영어가 서툴어서 이해 부탁합니다. 한국에서 왔다고요? 맥길 대학교 근처에 감자탕이 정말 맛있는데 혹시 알아요?"
"아, 그 감자탕 저도 진짜 좋아해요! 평일에만 열어서 자주 못 가지만요."
"제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에요. 그거랑 치킨도 맛있더라구요. 제 와이프는 우크라이나 사람인데, 이번에 미국에서 우크라이나 이민 프로그램이 폐지되어서 걱정이에요. 와이프 가족들은 미국에 살거든요."
"그럼 캐나다로 올 수는 없나요?"
"그럴 수가 없어요. 의무적으로 군대에 갔어야 하는데, 군대에 갔던 기록 때문에 캐나다 입국이 거절되었어요."
"아, 저런..."
"나는 부모님이 베트남 사람이지만 몬트리올에서 태어나고 자랐어요."
"아, 그럼 프랑스어를 잘하겠네요!"
"그럼요. 프랑스어 하죠."
"그런데 왜 프랑스어가 어렵다고 했어요? 거의 모국어일텐데."
"문법이 복잡하잖아요! 저는 언어를 별로 안 좋아해서. 수학을 좋아해요. 그리고 미식축구를 좋아하죠. 그 둘을 결합해서 아이들에게 수학을 가르치는 시스템을 만드는 게 제 꿈이에요. AI에게 응용방법을 가르치는 중이예요."
"멋지네요. 수학을 좋아한다고요?"
"네, 지금은 박사과정을 하고 있어요."
"대단하네요. 베트남 음식은 좋아하나요? 쌀국수가 진짜 맛있는데."
"저는 베트남 음식 빼고는 다 좋아해요."
"하하하!"
"나는 뉴브룬즈윜에서 왔어요. 캐나다 동쪽 바다가 있는 곳이죠. 우리 마을은 랍스터가 유명해요."
"와, 랍스터요? 비싸잖아요?"
"맞아요. 우리 마을 번화가에서 먹으면 랍스터 한 접시에 40~50달러 하죠. 그런데 알아요? 그 식당가에서 한 골목만 가면 시장이 있는데, 시장에서는 랍스터 한 마리가 6달러밖에 안 해요!"
"잠깐. 그렇게 싸다구요? 언제 마지막으로 갔는데요?"
"음, 12년 전이네요."
"그러면 지금도 그렇게 쌀 리가 없잖아요!"
"하하하, 그래도 6달러라니까요. 우리 동네에는 커다란 랍스터 조각상이 있어요."
한참 랍스터 자랑을 듣던 테일러라는 사람이 내게 물었다.
"저런, 한국에도 뭐 자랑할 만한 거 없어요? 랍스터는 이겨야죠!"
"글쎄요... 나는 한국에서 먹은 해산물이라면... 생선 말고는 새우를 먹고, 이곳에서는 잘 안 먹는 미역이랑 김을 먹고요, 난 오징어를 좋아해요."
"오징어요? 혹시 문어도 먹어요?"
"아, 문어 좋아하죠."
"말도 안 돼! 문어를 먹다니 너무해요!"
"문어가 얼마나 맛있는데 그래요?"
"그치만 넷플릭스 문어 다큐멘터리 봤어요? 문어가 얼마나 귀엽고 똑똑한데!"
"아, 나도 봤어요. 그거 보고 눈물이 다 났는데. 그치만 맛있어요. 안 먹어봤으면 몰라요."
나는 엄마가 특별한 날에 해주던 문어숙회가 떠올라서 입맛을 다셨다.
초고추장에 찍어서 먹으면 그것만큼 맛있는 게 없는데.
다들 자기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모였다.
그게 결국 우리가 서로를 이해하려고 애쓰는 방식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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