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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트리올 생활

유쾌하고 수다스러운 시큐리티 가드, 애덤

by 밀리멜리 2020. 9.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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핀터레스트 이미지

 

오전 11시, 우리 집 건물 전체가 정전이 되었다. 컴퓨터가 작동하지 않으니 갑자기 할 게 없어져 혼란스러웠다. 아니, 노트북은 작동하는데 정전 때문에 인터넷도 막혀서 그야말로 멍했다. 할 게 없었다. 코로나 시대에 우리는 이렇게 인터넷에 의지하고 있구나.

 

1층으로 내려와 애덤에게 인사를 했는데 영 표정이 좋지 않다. 마스크 밖으로 보이는 반달모양 눈의 양 끝이 추욱 쳐져있었다. 애덤은 혹시 정전이 되었으면 리스트에 호수를 적으라고 했다. 이미 빼곡하게 여러 호수가 적혀 있었다. 또 다른 입주민이 우리 뒤로 오더니 큰 소리로 불만을 표했다.

 

"우리 집에 애들도 있고, 손님도 왔는데 정전이 되버리면 어떡해요!"

 

애덤은 차분하고 프로페셔널하게 전기회사가 정전을 처리하는 중이라고 응대했지만 그의 표정은 여전히 어두웠다. 흐음, 정전이 된 게 애덤 탓은 아닌데, 시큐리티 가드가 주민 불만사항도 받는 감정노동도 하고 있었군. 그래서 기분이 좋지 않았나.

 

애덤 완전 스트레스 받았구나, 커피라도 사다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애덤이 커피를 원래 마시는지, 마시면 블랙을 마시는지 달달한 걸 마시는지, 설탕 들어간 걸 아예 안먹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산책을 끝내고 돌아와서 애덤에게 물었다.

 

"Hey Adam, do you like coffee?" (애덤, 커피 좋아해?)

"Oh, yes." (응, 좋아하지.)

"Sweet one or black?" (달달한 거 아님 블랙?)

"...?"

 

애덤은 잠시 표정을 살짝 찡그리더니 웃으며 말했다. 

 

"아, 강아지들 다 귀엽지. 난 작은 개보다는 큰 개들이 좋더라. 아, 허스키도 좋지만 그레이트 데인이 좋아. 허스키는 완전 망나니들이야. 훈련이 어렵거든. 근데 그레이트 데인은 말야, 오, 그 긴 다리로 나한테 안기면 내 어깨에 오겠지? 정말 그레이트 데인 키우고 싶어."

 

애덤의 수다스러운 말을 듣다가 뭐가 문제인지 깨달았다. 내가 커피(coffee)라고 말한 걸 퍼피(puppy)라고 알아들은 것이었다. 아, 고질적인 p 발음과 f 발음차이!

 

"아, 퍼피가 아니라 커피 좋아하냐구."

 

"퍼피가 아니라 커피? 으하하하. 그랬구나, 와우, 커피 좋아하지. 단 것도 좋고 블랙도 좋아."

 

"내가 잘못 발음했나?"

 

"아니야, 아니야. 마스크 때문이야. 아, 근데 난 정말 강아지 좋아하거든. 근데 우리집 건물에서는 반려동물 못 키우게 해서 정말 안타까워. 그것만 아니면 벌써 키웠을 텐데. 이사 가면 강아지부터 입양할거야. 물론 보호소에서 입양할거고. 그리고 훈련 잘 시킬거야. 너 알아? 여기서는 반려견이 다른 사람들을 만지거나 올라타기만 해도 강아지를 안락사 시키는 거?"

 

"정말이야? 올라타기만 한 건 너무 심한데?"

 

"그런 일이 있었어. 아무튼, 퍼피가 아니라 커피였구나. 나 커피도 정말 좋아해. 나 석사 공부할 때, 커피 없으면 못살았거든. 알지? 그런거. 지금도 일하는데 피곤하니 마시면 좋고. 아, 그치만 너무 단 건 싫어. 여기는 모든 음식이 너무 달아. 설탕을 너무 많이 쓰고. 그래서 요즘은 차를 마시려고 하지. 음식도 너무 외식을 하는 건 싫어. 그 가공과정에 뭐가 들어갈지 어떻게 알아? 너무 산업화되었단 말야. 집에서 요리를 하면 좋지. 요새 나 요리하거든."

 

애덤은 쉬지 않고 이야기했다. 강아지로 시작해서 캐나다의 반려견 정책, 자기가 마시는 커피 품종, 새로운 커피 기계, 집밥 요리 찬양 등등 애덤의 이야기소재는 끊임이 없었다.

 

"나 얼마 전에 팟타이 만들었거든."

 

"와, 진짜? 그걸 집에서 만들 수 있는거야?"

 

"뭐 사실 백퍼센트 내가 손수 만든 건 아냐. 소스를 사면 되거든. 시판 소스를 썼으니 그게 아쉽긴 하지만 한번 너도 만들어봐. 진짜 맛있었어. 외식은 정말 안좋아. 얼마나 많은 설탕과 화합물을 쓰는지 말야. 그거 먹고 또 아프면 병원 가야하고, 의사한테 돈 내고. 약국가서 약 사고. 결국 상업화된 물건들은 인간한테 유해해. 흠, 근데 상업화된 물건들 중에 인간한테 유해하지 않은 물건이 하나 있지. 이건 조크인데 말야."

 

"인간에게 좋은 물건이란 말이지? 그게 뭔데?"

 

"자, 진짜 이건 조크야. 콘돔! 콘돔이야말로 상업화되어서 좋은 물건이지."

 

사실 포스팅을 올리는 지금에서야 애덤의 조크를 이해했다. 저 대화를 할 때는 애덤의 조크를 이해하지 못했다.

 

"아... 그렇구나. 나, 여기 온지 2년밖에 안되었거든. 이런 문화를 배우려는 중이야. 요샌 데이브 샤펠 스탠딩업 코미디 보고 있거든."

 

"그랬구나? 나중에는 이해하게 될거야. 데이브 샤펠 쇼 정말 좋지. 스스로 그런 걸 공부하려고 하다니 대단하다. 아마 또 다른 걸 공부하려면 에릭 안드레를 봐. 에릭 안드레 정말 대단하거든. 난 얼마 전에 에릭 안드레 공연까지 보러 갔었거든. 내 전여친이, 하... 내 전여친이 표를 구매했었는데."

 

전여친을 언급하며 아련한 표정을 짓는 애덤이었다.

 

"전여친? 어쩌다 헤어졌는지 물어봐도 돼?"

 

"하... 정치적 견해 차이 때문에."

 

"정말? 와... 헤어질 정도로 정치적 의견이 달랐던 거구나."

 

그러자 애덤은 자신의 정치 견해, 자신이 정치학을 전공했다는 점, 캐나다 정치와 미국 정치, 석사 생활의 어려움, 인문학 소외현상 등등에 대해 떠들었다. 애덤이 얼마나 수다스러웠는지, 30분 가량은 떠든 것 같았다. 다들 격리되어 소통이 힘든 코로나 시대에 친구가 생긴 것 같아 즐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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