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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트리올 생활

추리소설을 읽다가 - 형사를 만난 기억

by 밀리멜리 2020. 10.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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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북으로 빌린 추리소설을 보다가 이런 대목에서 잠시 멈추고 한창 딴 생각을 했다. 

 

"7월의 어느 날, 형사가 찾아와 그의 죽음을 알렸다. 형사는 내가 작품 속에서 그렸던 것보다 훨씬 평범했는데, 대신 분위기는 있었다."

 

형사를 실제 보면 생각했던 것보다 정말 훨씬 평범할까? 소설이나 영화에서 보는 형사의 모습과 실제 형사는 많이 다르겠지? 기억을 되짚어 보니, 나도 형사를 만난 경험이 있다. 

 

한국에서 강사로 일하던 어느 토요일이었다. 토요일이어서 4시쯤인가 일찍 퇴근을 할 수 있어서 기분이 좋았다--- 잠깐, 이게 뭐야. 토요일 일한 것도 수당 못받았는데, 일찍 퇴근을 해서 좋다니 이게 정말 무슨 노예 근성이야. 아침 9시부터 토요일 4시까지 무상으로 일한 게 지금 생각하니 뭐가 좋다고.... 도대체 난 어떻게 살아온 거냐.

 

여하튼, 퇴근길에 해를 볼 수 있어서 좋았던 것 같다. 2월쯤, 아직 패딩을 입던 쌀쌀한 날이었다. 집에 가는 버스를 타려고 정류장으로 향했는데, 정류장 앞 벤치에는 20대 초반의 여자가 휴대폰을 보고 앉아 있었고, 그 또래로 보이는 남자가 옆에 서 있었다. 그 남자는 대뜸,

 

"야, 야! 너 왜 나 무시해. 내가 물었잖아."

 

하고 그 여자에게 소리치는 것이었다.

 

"뭐냐고. 뭘 묻냐고."

"왜 나 무시하냐고, XX."

"아 좀 꺼지라고!"

 

그 말을 기점으로 그 남자가 갑자기 여자에게 달려들어 주먹으로 얼굴을 내리치는 것이었다. 나는 깜짝 놀라 그들을 쳐다보았고, 그 순간에도 남자는 여자를 발로 차고 때리고 넘어뜨려 계속해서 폭력을 가하고 있었다. 한낮 아파트 주택가에서 생긴 무차별 폭력사건이었다.

 

일단 폭력을 제지시켜야겠다 싶어 말려보았지만, 20대 남자의 힘을 당해낼 수는 없었다. 여자를 보호해주려다가 걸치적거리는 내가 방해되었는지, 그 남자에게 나도 배를 한 대 맞아 부웅 하고 날아가 인도에서부터 도로로 내팽개쳐졌다. 다행히 두꺼운 패딩을 입어서, 나는 크게 다치지 않았다. 누군가 도와주길 바랐지만, 아무도 없었던 것 같다.

 

어쨌든 정신을 차리고 경찰에 신고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내팽겨쳐지고 핸드폰을 꺼내는 순간에도 폭력이 멈추지 않았기 때문에 어떻게 해야 저 사람을 멈출 수 있을지-- 그 짧은 순간이 너무나 길게 느껴졌다. 경찰에 신고한다는 말을 듣고 멈추기를 바라며 소리쳤다.

 

"경찰에 신고할 거예요! 당장 그만둬요!"

 

내 말이 들리지 않는지, 그는 욕을 하며 계속해서 폭력을 가했다.

 

"저 이 사람, 모르는 사람이에요!"

 

그녀는 맞으면서 그렇게 소리쳤다. 신고하는 것밖에 도와줄 방법이 없었다. 어떻게 휴대폰으로 신고를 하고, 이곳이 어딘지,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무슨 말을 했는지 지금 와서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저 눈앞에 너무 참혹한 폭력이 벌어지고 있었고, 나도 그렇게 누군가에게 맞아서 날아간 적이 없었다. 경찰이 와주기 전에는, 그저 그만하라고 소리지르는 수밖에 없었다. 왜 아무도 도와주는 사람이 없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경찰이 도착하기 몇 분 전에야 지나가던 남성 두세 분이 겨우 그를 말려 떼어놓을 수 있었다. 소리를 듣고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경찰차가 3대 도착하고, 상황을 정리하고... 여자의 이마와 입 주변에서는 피가 흐르고 있었다.

 

경찰이 나에게 와서 신고하신 분이냐고 묻길래 맞다고 했고, 나도 폭력을 당했냐고 묻길래 한 대 맞았다고 했다. 피해사실을 고발할 것이냐고 묻길래, 나는 별로 넘어진 정도의 상처라 내가 얼마나 다쳤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경찰관은 잠시 생각하더니 증인으로 와줄 수 있냐고 물었다. 피해자를 돕고 싶었기 때문에 나는 당연히 그러겠다고 했다.

 

동네 지구대와 경찰서가 다른 곳인줄 그때 처음 알았다. 경찰서는 생각보다 한참 먼 곳에 있었다. 경찰차 뒷좌석에 여자분과 함께 앉아 창밖을 바라보았는데, 온통 황량한 평지이고 버려진 공사현장 같은 곳으로 한참을 갔다. 주택가를 벗어나 버스도 오지 않는 곳에 경찰서가 있었다. 그 차 안에서, 나도 한 대 맞은 트라우마가 있어 몸을 덜덜 떨며 앉아 있었는데, 그 여자분은 얼마나 떨었을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경찰서에 앉아 사건에 대해 피해자와 둘러앉아 잠시 이야기하다가, 곧 피해자의 보호자가 와서 그녀는 병원으로 갔다. 나는 남아서 조서 작성하는 것을 도왔다.

 

이 때가 내가 처음으로 형사가 일하는 것을 본 때이다. 조서 작성하는 건 무척 길고 지루했는데, 했던 질문을 바꿔서 또 하고 또 했다. 방금 전 일어난 일이었는데도 기억이 흐릿했고, 정신 차리면서 대답하려고 노력했지만 이상하게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잘 파악할 수가 없었다. 가해자가 욕을 많이 하고 그 외에도 말을 많이 했지만, 형사분의 질문에는 '그가 무슨 말을 했는지 모르겠다'라는 대답을 많이 했다. 조서 작성이 끝나고, 형사분은 경찰서 근처에는 버스가 없다며 나를 집까지 데려다 주었다. 사건이 해결되는 대로 연락을 주겠다고 했지만 나는 가해자가 결국엔 어떤 처벌을 받았는지 모른다.

 

형사, 절대 이런 이미지가 이니다.

 

여하튼, 이 소설에서 말하는 것처럼, 형사는 생김새는 평범했지만 분위기가 범상치 않았다. 전혀 영화배우처럼 생기지 않았지만, 그의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힘이 있었고 내 속을 꿰뚫어 보는 것 같아 그 앞에서 절대로 거짓말을 할 수가 없었다. 현장으로 출동했던 경찰관이나 순경과는 전혀 다른 위압감이 있는 사람이었다.

 

어쨌든 경찰서에서 형사를 만난 경험은 아직까지 강렬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형사와 순경의 차이를 좀 더 설명하고 싶은데, 글쎄, 위압감이라는 말 이외에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 지 모르겠다. 어느 직업군이든 오래 종사한 사람에게서는 뭐라 표현할 수 없는 여유로움과 포스가 있는데, 형사는 아무래도 이 세상 일어나는 별 미친 일을 다 보고 겪어서인지 그 아우라가 더 강력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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