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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쳐리뷰/영상리뷰

보건교사 안은영 - 불친절하지만 귀여운 부조리극

by 밀리멜리 2020. 9.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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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이 <보건교사 안은영>은 왜 그렇게 유명한가요? 끝까지 볼 만한 가치가 있을까요?

 

영상미가 뛰어난 만큼 눈이 즐거운 시리즈입니다. 주연 배우인 정유미와 남주혁 뿐만 아니라 조연 학생들도 모두 비주얼이 뛰어납니다. 배경이나 소품을 세심하게 꾸민 것을 보니 미술팀이 혼을 갈아넣은 것 같습니다. 그리고 어마어마한 분량을 차지하는 퀄리티 있는 CG도 박수쳐 줄 만 합니다. 은영이 무지개색 장난감 칼을 들고 젤리괴물을 팟 하고 터뜨리면 알록달록한 화려한 젤리들이 팡팡팡팡 하고 터지는 장면이 있는데요. 그걸 보면 꼭 유튜브에서 이유없이 멍하게 보게 되는 공장에서 아이스크림이나 캔디를 만드는 영상을 보는 것 같아요. 뭔지 감이 오시나요?

 

<보건교사 안은영>의 한 장면 vs 이상하게 만족스러운 유튜브 영상

<보건교사 안은영>시리즈가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방법은 조금 불친절합니다. 등장인물들의 발음이 정확하지 않아 자막을 켜야 했던 것이 아쉬웠습니다. 한국 드라마를 보는데 자막을 켜야 하다니... 외국인이 한국 드라마를 보면 이런 느낌이겠구나 싶었습니다. 더 당황스러웠던 것은, 자막을 켜고 보는데도 장면들이 너무 기괴해서 무슨 상황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던 거죠.

 

마치 1950년대 후반 유럽에서 유행했던 부조리극을 보는 느낌이었습니다. 사뮤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를 읽으면, 두 주인공이 고도를 한없이 기다리며 의미없는 말장난을 합니다. 그게 이야기의 끝입니다. 왜 기다리는지도, 두 사람이 뭘 하는지도, 기다리던 고도가 결국 오는지도 아닌지도 모르는 이 작품은 정상적인 이성을 가지고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게 뭐야?! 하며 화를 내며 책을 덮게 되는데, 이게 뭐야??? 하는 그 황당함이 바로 부조리극의 포인트입니다.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보건교사 안은영>도 이런 부조리극의 영향을 많이 받은 듯 합니다. 은영이 왜 하필 장난감 칼과 비비탄 총으로 젤리사냥을 하는지, 젤리는 왜 하필 젤리인지, 저 잘생긴 학생은 왜 우스꽝스러운 닭 탈을 쓰고 있는지, 또다른 잘생긴 학생은 왜 혼자서 스탑모션으로 멈춰있는지, 학교에 뜬금없이 오리들이 왜 돌아다니는지 아무 설명이 없습니다. 이게 뭐야?! 가 절로 나오는 순간이죠. 도대체 왜 그러는데? 아무리 판타지라지만 말이 안되잖아? 라는 시청자들에게 감독은 '그게 바로 포인트야' 라고 말하는 듯 싶네요.

 

너... 잘생긴 얼굴로 왜 그러고 있는건데...

 

각 에피소드는 한 시간 분량인데, 이야기 전개가 무척 느려 답답할 정도입니다. 제가 시청할 때도 답답해서 가슴을 두드릴 정도였는데요. 하지만 리뷰를 쓰는 지금 와서 생각하니 이런 답답한 전개도 감독이 의도한 거라고 생각되네요. '답답해! 그래서 어떻게 되는건데? 빨리 보여줘!' 하고 화가 난 시청자들을 살살 달래듯 유혹하며 슬쩍 슬쩍 이야기를 전개시키는 거죠. 마치 아이돌 싱글 발매 전 15초의 티져를 보여주듯, 시청자들을 감질나게 하기 위해 일부러 느린 전개를 쓴 것 같네요. 제작진들이 무척 똑똑한 전략을 썼지만 시청자 입장에서는 마음에 들지 않네요. 어쩔 수 없죠, 속아 넘어 가 줄게!  

 

이런 황당함을 좀 더 즐기려면 저도 단련이 필요합니다. 처음부터 푹 빠지기엔 어렵네요. 제 친구가 추천해 준 에릭 안드레의 부조리 코미디도 아직 즐기기에는 경험치가 모자라거든요. 원작 소설을 아직 읽지 못했는데, 원작 소설은 아마도 등장인물의 행동이나 장면들이 자세한 설명이 되어 있는 제대로 된 판타지 소설인 것 같습니다. 드라마로 각색하면서 설명이나 나레이션을 빼고 이런 황당한 요소를 집어넣은 것 같은데, 그게 성공적인 시도인지 아닌지는 조금 더 기다려봐야 할 것 같아요.

 

아직도 끝까지 볼지 말지 마음을 못정했는데, 아마 내일 식사하면서 볼 것 같습니다. 한국 드라마에서는 한번도 시도하지 않았던 신선한 장르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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