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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공부

17세기 네덜란드의 튤립 버블 - 사실 튤립 버블은 없었다

by 밀리멜리 2021. 5.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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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은행을 갔는데, 은행 앞 화단에 예쁘게 핀 튤립을 봤다. 튤립이 필 계절이구나 싶어서 한참 보다가, 튤립이 심어진 곳이 은행이라는 점이 신기했다. 하필이면 은행 앞에, 누가 무슨 생각으로 튤립을 심었을까? 튤립은 버블의 상징이나 마찬가지 아니야?

 

하필 은행 앞에 튤립을?

 

 튤립 버블 (Tulip Mania)

 

경제학 이야기 중에서도 튤립에 관한 이야기는 특히 재미있다. 튤립 버블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나타난 최초의 경제 버블로 여겨진다.

 

17세기 네덜란드는 엄청난 부를 누리던 나라였다. 세계 최초의 주식회사이자 다국적기업인 동인도회사를 통해 인도에서 후추무역을 하고, 동남아의 향신료와 중국의 사치품들을 마구 들여와 수익이 폭발적으로 증가했던 것이다. 동인도회사가 지금의 애플보다 몇 배나 많은, 역사상 최고의 시가총액을 가지고 있었다고 하니 그 부가 얼마나 컸는지 상상하기가 힘들다.

 

동인도 회사 주식을 거래하는 17세기 암스테르담의 주식거래소 (위키피디아)

동인도 회사가 생기고, 식민지 무역으로 남아도는 부는 꽃으로 흘러 들어왔다. 꽃도 그냥 꽃이 아니라, 당시 터키에서 수입된 튤립에 집중되었다. 하지만 꽃이란 그렇게 쉽고 빠르게 얻을 수 있는 상품이 아니었다. 튤립 구근을 심어 꽃을 피우기까지 3~7년이 걸렸고, 심어도 발아하지 않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고 한다. 공급이 느리니, 수요는 더욱 빠르게 증가해 가격이 미친듯이 올랐다. 

 

네덜란드의 식물학자들은 독자적으로 품종개량을 해서 희귀하고 비싼 튤립들을 만들어냈는데, 그 중 가장 비싼 품종은 '센페이 아우구스투스(Semper Augustus, 영원한 황제)'였다.

 

센페이 아우구스투스 (위키피디아)

이 품종의 뿌리 하나가 우리 돈으로 1억 6천만원까지 치솟았다고 하니, 튤립에 투자하면 집을 바꾸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튤립은 거래소도 없이 술집에서 거래되었고, 꽃을 피우기까지 오래 걸리니 선물 거래를 해 투기를 불붙였다. 선물 거래라 큰 자본이 필요가 없었다.

 

튤립 광풍을 풍자한 그림. (위키피디아)

하지만 네덜란드 밖 외국인에게 이런 튤립 광풍은 생소한 것이었을 것이다. 이런 일화가 남아있다.

영국에서 온 식물애호가가 네덜란드의 친구집을 찾아갔다. 그 애호가는 보기 드문 양파 같은 것을 발견하고 그 껍질을 벗겨 속을 열어 보았다. 친구가 돌아오자 "이것이 무슨 양파죠?"라고 물었다. "데르 아이크 제독이라고 하는 겁니다", "감사합니다" 애호가는 노트에 필기까지 해가며 계속 물었다. "이게 네덜란드에 흔한 건가요?" 그러자 친구는 애호가의 목덜미를 잡고 "함께 행정관에게 가보면 압니다"라고 대답했다. 애호가는 금화 2000개의 배상금을 지불할 때까지 채무자의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위키피디아

 

하지만 튤립은 튤립일 뿐. 꽃을 사는 사람이 없어지면 가격도 무의미해진다. 1637년 2월 3일, 구매자가 없어져 버블이 붕괴된 것이다. 어음은 부도가 나고, 채권자와 채무자들의 말다툼과 도주가 잇달았다. 소송을 걸어도 채무자에게는 이행 능력이 없었고, 결국 네덜란드 의회에 의해 튤립 계약서가 모두 무효가 되었다. 

 

튤립 가격의 변동

 

 

 

 튤립 광풍은 사실 없었다

 

이렇게 튤립 거품이 꺼진 후, 상인들은 구걸을 하는 처지가 되었고, 귀족들도 영지와 재산이 파괴되는 것을 그냥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는 기록이 있다. 하지만 이 기록은 과장된 면이 있다. 더욱 재미있는 사실은 튤립 버블이 그렇게 큰 사건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미국의 역사학자 앤 골드가(Anne Goldgar)에 따르면, 이 튤립 파동은 거시 경제에 별 실질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고 한다. 당시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가 벌어들이는 부는 막대했고, 튤립 파동이 있고 나서도 네덜란드의 부는 아주 건재했다고 한다.

 

튤립에 집착하는 어리석음을 풍자하는 그림

네덜란드 가정의 1년 생활비에 맞먹는 튤립의 가격이 폭락하고, 물론 튤립 시장은 완전히 무너졌다. 하지만 튤립 시장이 무너진다고 경제가 무너지는 건 아니었다. 굴뚝 청소부와 하녀까지 튤립 광풍에 달려들었다는 말이 있지만, 사실 이런 극빈층들은 튤립 구근을 살 수조차 없었다.

 

튤립 거래에 참여한 사람들은 대부분 부유한 상인들이었고, 역사학자 골드가의 계산에 따르면 꽃을 살 수 있었던 사람은 350여 명에 불과하다고 한다. 게다가 대부분이 선물거래와 어음거래였으니, 현물과 현금이 흘러들지 않아 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미미했다. 

 

부유한 네덜란드인에게 있어 튤립이란 그저 돈이 넘쳐나서 잠깐 건드려 본 이국적인 사치에 불과했던 것이다. 예술품도 사고, 외국의 희귀한 물품도 수집해보고 하는 와중에 나타난 유행하는 아이템이 보라색 흰색이 섞인 돌연변이 꽃이었던 것 뿐이었다. 그러니 '튤립 매니아'니 '튤립 광풍'이니 하는 말은 사실 과장된 것이나 다름없다.

 

그러면 왜 그렇게 튤립 버블이 과장되었던 것일까? 당시 유럽에서는 종교개혁이 일어났고, 칼뱅주의가 널리 퍼졌다. 도덕적 타락이나 어리석음을 죄악시했으며, 어리석은 사람들을 팜플랫이나 시로 풍자하는 전통이 있었던 시대였다. 당시 사람들은 튤립에 집착해 상류 사회로 진입하려다 실패한 소수의 사람들을 비웃으며 꼬집었던 것이다.

 

그런 풍자를 후대 역사가들이 진실로 받아들이고, 결국에 튤립 마니아로 받아들이게 되었다는 것이 역사학자 골드가의 입장이다.

 

(출처: www.history.com/news/tulip-mania-financial-crash-holl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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