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가시노 게이고는 추리소설로 유명한 작가이니, 이번에는 한번 꼭 범인을 맞춰보겠다는 마음을 먹고 책을 읽기 시작했다.
** (책 내용에 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어느 날, 일본의 어느 대기업 회장이 오랜 지병으로 사망한다. 이 회장은 세 자녀가 있지만, 자녀들이 회사 경영에 큰 관심이 없어 친척에게 회사를 물려준다는 유언을 남겼다. 한국에 재벌이 있듯이 일본도 비슷한가 보다.
그러나 회장의 장례식을 치르고 일가친척이 모여 유산과 유품을 나누던 중, 후계자로 내정받은 대표이사가 죽음을 당했다. 과연, 이 대표이사를 누가 죽인 것일까?
이 소설에서 용의자는 다행히도 그렇게 많지 않다. 대기업의 회장 후계자를 죽여서 이득을 보는 사람은 누구일지 생각하면서, 너무 뻔한 사람을 제외하면 쉽게 맞출 수 있을 것 같다.
그렇다고 이번에 내가 범인을 맞혔느냐 하면 그건 아니다. 의심은 했지만 결국 맞추진 못했다.
하지만 이 소설에는 이 사건의 범인을 찾는 것 말고도 더 재미있는 인연의 끈이 얽혀 있다. 스포일러가 되지 않도록 조금씩만 소개하자면, 회장의 며느리인 미사코의 이야기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미사코는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하고 취직이 잘 되지 않아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말도 안 될 거라는 걸 알지만 대기업 전산회사에 지원을 해 봤는데 운이 좋게도 취직하게 되었다. 게다가 일을 시작하고 1년이 지난 후, 신기하게도 회장이 저녁식사를 초대하는 것이 아닌가?
부담스러웠지만 미사코는 그 자리에 나갔고, 회장의 가족들과 함께 식사를 하게 된다. 그곳에서 의대생인 회장의 첫째 아들과 만나게 되고, 그것이 인연이 되어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해 재벌집 며느리가 된다.
미사코는 평범한 자신에게 어떻게 계속 이런 행운이 찾아오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이런 일들은 사실 행운이라고 할 수도 없겠다. 재벌 2세이지만 회사를 물려받지 않고 뇌신경과 의사로 일하는 남편은 외적으로는 아주 완벽하다. 하지만 미사코는 남편과 공감하거나 인간적인 면모를 찾아볼 수 없어서 결혼 생활에 허무함을 느끼고, 남편을 신뢰하지만 애정을 느낄 수 없어 불안해한다.
미사코가 남편을 만난 것은 행운이 아니라 오히려 숙명이라 해야 맞겠다. 미사코가 이런 운명을 갖게 된 것은 남편이나 미사코의 탓이 아니라 대기업 창업자인 회장의 아버지로부터 시작된 비밀스러운 일과 관계가 있다. 이제는 남편만이 알고 있는 것 같은 이 비밀은 도대체 무엇일까?
그 비밀에 대한 것은 미사코와 남편이 처음 만났을 때 한 대화에서 힌트를 찾을 수 있다.
미사코와 회장 가족의 식사 자리에서, 예비 남편은 미사코에게 "기업 경영하는 남자가 좋으냐, 의사가 좋으냐"라고 묻는다. 첫 만남에서 대담한 질문을 받은 미사코는 어느 것도 대답할 수 없어 당황한다. 이후 둘은 따로 데이트를 했는데, 둘만의 자리에서도 그는 이런 말을 한다.
"기업은 사람의 몸에는 관심이 없어요. 그걸 무시하면서 번창해 나가는 거죠. 의사는 죽을 힘을 다해 그 뒤처리를 하고 있어요."
히가시노 게이고, 숙명. 35p.
이 부분을 읽고 맞아, 맞아 싶었는데 아무튼 이런 말을 한 데에는 더 의미심장한 이유가 있었다.
사실, 읽고 나서 엄청 재미있다는 느낌이 들지는 않는다. 약간 설정이 억지스럽다는 느낌도 든다. 일본 소설은 이제 그만 읽어야지 싶다가도 이 작가의 책은 재미있을 것 같아 선택하고, 다 읽은 후에는 또 약간 실망하게 되긴 하는데... (신간 블랙 쇼맨도 실망스러웠다) 아무래도 이 책은 초기작이니 그럴만하다 싶다.
히가시노 게이고는 책을 100권도 넘게 출판했다는데, 이런 초기작들이 기초가 되었겠구나 싶다. 초기작이 베스트셀러만큼 재미있을 수 없겠지. 그렇지만 소재는 정말 참신하다. 주인공들의 할아버지 대에서 시작한 일이 씨앗이 되어 3대를 걸쳐 내려와 이들의 운명을 만든다는 이야기는 꽤나 매력적이다. 이쪽 이야기가 범인 맞추는 것보다 더 재미있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드는 불편한 생각이 또 있다. 일본인들이 이 책의 주인공들과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다.
제 2차 세계대전에 당시 일본이 다른 나라를 침략하고 수탈했으며, 식민지 국가 사람들을 유린한 건 사실이지만, 그건 할아버지 대의 이야기고 다 지난 과거의 이야기라고, 일본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다. 자신들도 오히려 그 전쟁의 피해자이며, 어쩔 수 없는 숙명이라고 생각하는지도...
이렇게 생각하면 너무 멀리 나갔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아무튼 소설 속에 생체실험이 소재로 쓰이는 것이 매우 신경 쓰인다. 마루타가 생각나기도 하면서... 전체적으로 지루하진 않았지만 좀 찝찝한 뒤끝을 남기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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