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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미생활

나의 고베 여행기 - 여자 혼자 먹으면 안되나요?

by 밀리멜리 2021. 9.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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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천마을을 무사히 떠났다. 숙소에 도착하기 전에 고베시에 들러 저녁으로 맛있는 스테이크를 먹을 생각에 마음이 부풀었다. 아, 맛있는 와규 스테이크!!

 

맛집을 가려면 역시 사전조사가 중요하다. 며칠 전 여행 멤버 중 한 친구가 정말 좋은 식당을 알아와서 그곳에서 불쇼도 보고 정말 눈물 나게 맛있는 스테이크도 먹었다. 어떻게 똑소리 나게 쿠폰까지 구했는지... 덕분에 고급 레스토랑에서 스테이크를 저렴한 가격에 먹을 수 있었다.

 

그 스테이크는 너무 맛있어서 아무래도 일본을 떠나기 전에 한번 더 먹어봐야겠다 마음먹었다. 하지만 며칠 전 친구가 안내하는 대로 따라만 갔더니 역시 나 혼자서는 그 식당이 어디였는지 기억하지 못했다. 찾다 찾다 결국 길을 잃어버렸다!!

 

길을 잃었지만 그렇게 걱정하진 않았다. 우연히 헤매다 엄청나게 멋진 건물들이 있는 마을을 방문한 것이다. 알고 보니 인터넷에서 미리 본 적이 있는 '기타노 이진칸'인 것 같았다. 기타노 이진칸은 옛날 외국인이 많이 들어와 살던 곳이라, 예쁜 유럽식 건물이 많고 관광지로 유명하다.

 

서양식 건물이 많은 기타노 이진칸

 

이왕 길을 헤매는 김에 천천히 구경하려고 했지만, 이미 날이 늦어버렸다. 낮이라면 문을 열었을 건물들이 모두 문을 닫아 별로 볼 게 없었다. 스테이크 레스토랑도 찾지 못했고, 이제 볼거리도 없으니 대충 끼니를 때우고 숙소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튼 역으로 가는 방향을 물으려고 사람을 찾았는데, 이상하게도 거리에 사람이 없었다. 유럽식 건물이 가득한 기타노 이진칸을 지나니 거대한 저택들만 가득했다. 강남의 대저택들을 보는 느낌! 아무래도 이곳이 고베 시의 부촌인 듯했다. 저택들이 멋있기는 하다만, 날은 이미 깜깜해지고 왜 가로등도 별로 없고 으스스한지...

 

다행히도 길가는 젊은 아주머니를 만날 수 있었다. 이 분은 특이하게도 예쁜 기모노 위에 화려한 털이 달린 숄을 걸치고 있었다. 이렇게 부촌에 사는 사람들은 요즘 시대에도 기모노를 입나 싶었다. 재벌집 딸이나 며느리일지도 몰라! 이 아주머니만 딴 세상 사람인 것 마냥 옷이 특이했다.

 

"실례합니다. 역으로 가려면 어디로 가야 해요?"

"역 말씀이십니까? 저기 신호등이 보이십니까?"

 

일상생활에서도 이런 옷을 입는 분이 있군요...

말투도 보통 사람들과 확연히 달랐다! 이렇게 기품있고 우아하게 말하는 사람은 처음 봤다! 게다가 존경어와 겸양어가 섞여서 80%는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일본어 수업시간에 골치 아프게 배웠지만 거의 잊어버렸는데... 그래서 이 기모노 입은 아주머니의 말은 정말 너무 어려웠다. 간신히 '신호등'이라는 말만 알아듣고 고맙다고 말을 건넸다. 

 

"고맙습니다."

"그럼, 부디 안녕히 가시길." 

 

실제로 이렇게 말한 건 아니었다. 아무래도 알아들을 수 없어서 이런 식으로 인사를 했겠지 짐작만 할 뿐이다. 하지만 우아한 손짓과 말투는 생생하게 기억난다.

 

이 아주머니가 말한 대로 신호등을 건너니 다시 고베 도심의 불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제서야 뭔가 현실로 돌아온 느낌이 들었다. 그 고베 부촌에서 만난 아주머니는 마치 1900년대 초반 사람 같아서, 나츠메 소세키의 소설 <도련님>에 들어갔다 나온 기분이었다. 아... 설마 귀신은 아니었겠지 ㅋㅋㅋㅋ

 

다행스럽게도 쉽게 역을 찾을 수 있었다. 퇴근시간이어서 사람들 무리를 따라가니 곧 역이 나왔다. 하지만 아직 스테이크를 못 먹었는데....!! 어쨌든 저녁은 먹어야 하니, 역 앞의 아무 스테이크 가게에 들어갔다.

 

드르륵 하고 문을 열었는데, 모두 나를 쳐다본다. 왜지? 

 

"혼자세요?"

"네."

 

혼자면 뭐 어떤가? 한국에서 학식이나 레스토랑에서 혼자 먹는 것에 익숙해져서 나는 안내해주는 대로 자리를 잡았다. 셰프 바로 앞에 있는 자리였다. 스테이크 하나를 주문하니 셰프가 묻는다.

 

"닌니꾸 넣는 게 좋으세요?"

"네??"

 

모르고 "네?" 하고 한국말이 나와버렸다. 그런데 닌니꾸를 알아들을 수 없어서 그냥 계속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내가 외국인인 걸 알았는지 쉐프가 말을 바꾼다.

 

"가-리꾸, 가-리꾸 괜찮으세요?"

 

가-리꾸는 또 뭐야... 내가 모르겠다는 표정을 하자, 쉐프가 마늘 한쪽을 가져와서 넣어도 되냐는 시늉을 한다. 나는 그제야 보고 좋다고 말했다. 당연히 마늘은 오케이지. 음! 마늘이 일본어로 닌니꾸인데, 영어로는 가-리꾸구나..... 일본식 영어 못 알아듣겠다 ㅠㅠ

 

가-리꾸 넣을까요?

 

스테이크는 그냥 그랬다. 엄청 맛있지도 않고, 그렇다고 맛없다고 말하기에도 뭐한... 이전에 먹었던 레스토랑이 워낙 잘하는 집이었고, 이곳은 그냥 역 앞에 회사원들이 퇴근 후 끼니를 때우는 곳인가 싶었다. 

 

맛은 둘째치고, 식당 안에 들어섰을 때 나를 신기하게 쳐다보던 손님들의 눈빛이 기억에 남는다. 왜 그렇게 나를 쳐다봤을까? 이유는 한참 후에 알 수 있었다. 

 

알고 보니 일본에서는 여자 혼자 쉽게 외식을 할 수 없다고 한다. 이게 무슨 개소리야?!

 

굳이 여자들이 혼자 먹는다면 주로 카페나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먹고, 역 앞 식당 같은 곳에서는 혼자 잘 먹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여자 혼자 들어온 나를 신기하게 쳐다본 모양이다. 이런 문화는 참 씁쓸하기도 하고... 너무 이상하다.

 

일본 애니메이션 아따맘마에서도, 엄마 캐릭터가 역앞에서 튀김우동을 먹고 싶어하지만 혼자 갈 수 없어 아쉬워하는 장면이 나온다.

 

겨우 친구를 만나 함께 먹게 되는 엄마 캐릭터

 

아니, 맛있는 거 먹고 싶을 때 그럼 어떡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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