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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트리올 생활

외식하려면 백신 여권이 있어야 해요!

by 밀리멜리 2021. 10.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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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학교 친구 이스마엘이 연락을 해 왔다. 내 도움이 필요하다며, 급하다는 메시지를 남긴 것이다. 정말 급하긴 급했는지, 내가 미처 답장을 하기도 전에 전화가 울려왔다.

"안녕! 진짜 오랜만이지? 나 좀 도와줄 수 있어? 맛있는 거 사줄게!"

알고 보니, 엑셀과 워드 작업을 하는 데 어렵고, 자기는 타자가 빠르지 않으니 좀 도와달라는 거였다. 사실 학교 다닐 때에도 내가 이스마엘을 많이 도와준 적이 많았는데, 한국 사람이라면 대부분 할 줄 아는 폰트 키우기나 표 만들기 같은 단순 워드 작업이었다.

블로그 할 때 매번 타자를 치니 타자 치는 건 정말 일도 아니어서, 빠르게 끝낼 수 있었다. 단순 워드작업이 여기 와서는 정말 귀한 취급을 받기도 한다 😂

이스마엘의 일을 도와주는 동안 남친도 이스마엘과 친해져서 일을 마치고 맛있는 걸 먹으러 함께 나갔다. 내 남친이지만 친화력 갑이네... 나는 일년 넘게 학교 다녀서 겨우 친해진 걸.

레바논 식당에 갈까?


함께 레바논 식당 부스탄에서 슈와마를 먹기로 했다. 부스탄은 본점이 제일 맛있다.

트리오 하나 주세요

트리오를 시키면 슈와마 샌드위치 하나와 감자튀김, 음료수를 준다. 이 셋트메뉴가 양이 적다고 생각하면 플레이트를 시키면 된다.

이스마엘은 식당까지 오는 내내 배고프다고, 엄청 많이 먹어야겠다고 얘기했다. 이스마엘은 결국 플레이트 하나를 시키고, 나와 남친은 트리오를 시켰다. 나와 남친 몫은 따로 계산하려고 했는데, 이스마엘이 기어코 자기가 계산한다고 나서길래 고맙다고 했다.

"내가 산다고 했잖아! 진짜 이 조그만 트리오로 되겠어? 배고프지 않아? 큰 거 시켜!!"

아주 이럴 땐 한국인 보는 느낌이다. 사실 학교 다닐 때에도 내가 농담조로 '넌 진짜 나한테 한 턱 쏴야 한다'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그걸 기억했는지 더 시키라고 난리다.

계산하는 와중에 점원이 이렇게 묻는다.

"여기서 드실 거예요, 아니면 포장해 가실 거예요?"
"여기 테라스에서 먹으려구요."
"그럼 여권 보여주세요."
"네? 무슨 여권이요?"
"백신 여권 보여주세요."

여권이라길래 깜짝 놀랐는데, 백신 맞은 증명서를 보여달라는 거였다. 한참만에 이메일함 구석을 뒤져서 증명서를 찾아냈다. 아이고, 이제 백신 여권은 잘 챙겨 다녀야겠군.

트리오 메뉴

이스마엘은 우리가 시킨 트리오 메뉴를 보더니 이걸로 배가 차겠냐고 또 뭐라고 한다.
일단 한번 잡숴 봐... 아마 엄청 배부를걸?

플레이트 메뉴

플레이트 메뉴는 안에 고기와 감자, 볶음밥이 수북히 담겨 있다.

"내가 소고기 시켰으니까 같이 먹자. 너도 플레이트 시키라니깐 왜 내 말을 듣지 않니."
"너 이거 다 먹을 수 있나 어디 보자. 내 말을 안 들은 건 너야."

내 예상대로, 이스마엘은 플레이트를 반도 못 먹고 남겼다.

이래뵈도 양이 많다고

이스마엘은 코트디부아르 출신인데, 덕분에 밥먹는 동안 코트디부아르 특유의 언어 누쉬 몇마디를 배웠다. 코트디부아르는 한 나라 안에서도 여러 아프리카 민족이 있어서 언어가 다르고, 공용어로는 프랑스어를 쓴다고 한다. 누쉬는 프랑스어와 코트디부아르 언어가 섞인 언어라고 한다.

"쥬 프라야, 이거는 '나 나간다' 이런 뜻이야."
"그럼 '고맙다'는 뭐라고 해?"
"모!"
"오, 간단하네. 모, 이스마엘! 쥬 프라야!"
"오오! 잘하네~"

오랜만에 누쉬를 말해서 그런지, 이스마엘은 박수까지 치며 좋아했다. 이스마엘은 긍정적인 에너지가 강하고, 나이가 어려서 그런지 하는 행동이 다 귀엽다. 이스마엘 집안은 엄청난 부자여서 일을 안해도 한평생 먹고 살 걱정할 필요가 없을 정도이다. 아비쟝에 있는 자기 집 영상을 보여준 적이 있는데, 무슨 왕궁인줄 알았다.

하루는 학교에서 이스마엘의 아버지를 본 적이 있다. 키가 크고 양복을 입은 흑인 남자였는데, 이스마엘에게 뭔가 잔소리를 하고 있었다. 그때 인사할까 하다가 진지하게 혼나고 있길래 자리를 피해줬다.

아마 공부 열심히 하라고, 일도 해보라고 하는 게 아닐까 싶다. 그 이후로 이스마엘은 더 열심히 공부하고, 진지한 모습을 보인다. 마트에서 알바까지 하고, 다른 일도 찾고... 코트 디부아르로부터 날아온 아버지가 정말 단단히 정신차리게 해준 걸지도 모르겠다. 맡은 일을 열심히 하려고 해서 보는 사람까지 기분이 좋아진다.

특히나 타인이 서운할 만한 짓을 해도, 아무렇지 않게 넘기는 점이 대단하다. 뭔가 꿍할 만한 일이 있어도 일단 끝나면 지난 일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마음의 짐이 없고, 항상 밝은 얼굴이다. 이건 정말 배울 만한 장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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