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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트리올 생활/한국어수업

어쩌다보니 중학생의 연애상담을 하게 되었다

by 밀리멜리 2021. 10.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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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업을 하고 아이들과 친해지다 보니, 사춘기 학생의 연애 고민을 들어주게 되었다. 원래 수업시간 남은 20분동안 토론을 하려고 했었는데, 남자친구 고민으로 꽉 찬 A에게는 토론이고 뭐고, 상대 남자친구의 마음을 알 수 없어 그 생각뿐이다.

 

환경문제, 과학윤리문제, 성소수자 문제 등 토론거리는 가득한데, A는 그런 것들이 하나도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는다. 다 제쳐두고 제 앞에 놓인 수수께끼같은 감정에 사로잡힌 모양이다. 어차피 수업도 끝나가고 좀 지루했겠다, 우리는 다같이 이 친구의 고민을 들어주기로 했다.

 

토론하다 말고 갑자기 연애고민? 일단 들어나 보자.

 

한국나이로 중학교 2학년쯤인 A의 고민은 이러했다.

 

요즘 A의 머릿속은 남자친구로 꽉 차 있다. 2주 전, 오래전부터 좋아했던 남자애와 사귀기로 한 것이다. 행복한 감정도 잠시, 남자친구는 메신저에서만 다정하게 연락을 하고 학교 친구들 앞에서는 사귄다는 사실을 감추고 비밀로 한다.

 

그 때문에 학교에서 만나도 반갑게 인사하기조차 어색하다. A는 섭섭하기도 하고, 왜 굳이 감추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왜냐고 물어도 시간을 좀 더 달라는 말에 A는 스스로에게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왜 친구들 앞에서 내가 여자친구라고 말을 못할까?

 

 왜 친구들 앞에서는 날 숨겨?

 

나는 이전에도 친구들의 연애상담을 자주 해주었는데 이번에는 말이 막혔다. 글쎄, 뭐라 해줘야 할까? 금방 답이 나오지 않았다. 요즘 애들 기준으로도 2주는 좀 이르니 말 그대로 시간이 더 필요한 걸지도.... 아닌가?

 

A의 말을 듣던 B는 자기도 그런 경험이 있다고 맞장구를 쳐주었다. 메신저에서는 달콤한 메시지를 보내고, 다정하고 관심있는 티를 팍팍 내지만, 실제로 만나서는 눈도 못마주치는 사이의 친구가 있다고. 수줍어서 그러는 건지 다른 이유가 있는 건지는 알 수 없다고 한다.

 

과연, 나는 캐치하지 못한 미묘한 감정을 또래 친구는 캐치했다. 어릴 때부터 SNS를 하고 판데믹 격리생활을 한 세대들이 겪을 만한 연애 고민이 아닌가 싶다.

 

문자로는 말을 잘해도 실제로는 부끄러운 걸지도?

다른 친구 C가 물었다.

 

"궁금해서 그러는데, 그런 애를 왜 만나? 좋다고 당당하게 이야기도 못하는데... 매력이 뭐야?"

 

"그게 문제야! 나도 걔가 왜 좋은지 모르겠어. 초등학교 땐 서로 원수지간이었거든. 예전엔 서로 뒷담화도 했었어. 나는 걔 욕하고, 걔는 나 욕하고... 그래서 친구들 앞에서 밝히기 싫은 건가? 근데 나는 그런 거 아무 상관 없거든."

 

어릴 땐 서로 원수지간이었다는 말에 나는 빨강머리 앤이 생각났다. 길버트가 앤을 보고 머리가 홍당무처럼 빨갛다고 놀리자, 앤은 화가 나서 그만 석판으로 길버트의 머리를 쳐서 석판을 부숴버린 것이다. 이런 난장판 뒤에도 둘은 커플이 된다.

 

초등학교 때 원수지간이 커플이 되기도 하지

 

"그런 게 고민이면, 드라마를 보는 건 어때?" 

 

C는 요즘 한국 드라마에 푹 빠져 있다. 연애 이야기엔 사랑싸움이 빠질 수 없으니, 그들이 갈등을 풀어나가는 방식을 보고 참고해도 되지 않겠냐는 이야기였다.

 

"드라마는 드라마고오~ 현실은 현실이잖아~~"

 

A는 드라마보단 애니메이션을 더 좋아한다.

 

드라마 속 연애 이야기는 현실과 얼마나 비슷할까?

 

가장 조용한 D에게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물으니, D가 무심하게 말했다.

 

"그냥... 너 자신에게 포커스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남자친구 너무 신경쓰지 말고... 다른 해야할 일도 많으니까."

 

사실 이 말은 모두가 A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었다. 항상 말이 별로 없던 D가 예리하게 정곡을 찔렀다.

 

남자한테 뭐하러 신경쓰니... 우리 일이나 잘하자...

 

A가 남자친구의 행동에 지나치게 고민하고 신경쓰는 건 사실이었다. A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맞아, 나도 알아. 나 혼자만 이렇게 자꾸 생각하는 것 같거든. 자꾸 생각하니까 더 신경쓰이고, 그래서 더 조급해지는 것 같긴 해. 그래도 이렇게 이야기하니까 좀 후련하다." 

 

고민을 털어놔서 후련하다니 좀 낫다. 원래 연애 상담은 답이 없고, 둘이서 풀어가야 할 문제니까. 답답한 마음이 조금이나마 풀려서 다행이고, 이런 속마음 이야기를 한국어로 잘 해내는 것도 대견하다. (물론 너무 답답할 때는 영어로 마구 속사포 랩을 쏟아내긴 했지만🤯) 아무튼, A의 고민이 잘 풀리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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