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싶은 영화를 마구 찜해놔서 볼거리가 한가득이다. 캐나다에 오고 나서부터는 한국 영화를 잘 볼 수가 없다. 그래서 한국에서 유명했다던 영화들을 다 찜해놓고 미뤄놨다. 노트북으로 찜해놓은 영화들을 둘러보고 있는데, 82년생 김지영이 큰 화면으로 떠올랐다. 잠깐 첫 20초를 보고 있는데, 바로 그 20초만에 푹 빠져 버렸다.
남친이 와서 물었다.
"어! 이거 그거네. 유명한 영화. 89년생 공지영 그거지!"
89년생 공지영? 이 총체적 난국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 연도도 틀리고 이름도 틀렸어 ㅋㅋㅋㅋ
"아아니! 89년생 공지영 아니고 82년생 김지영. 공지영은 소설가고!"
"아, 어쩐지 공지영 들어봤는데..."
"근데 헷갈리는 것도 그럴 수 있어. 지영이라는 이름 진짜 많으니까. 이름을 지영이라고 지은 이유가 그거래. 우리나라에서 제일 흔한 이름이고,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서 작가가 이름을 그렇게 지었대."
"너 책 읽었어?"
"예전에 한창 베스트셀러 1위할 때 읽어봤지. 아, 책으로 읽었을 때 답답하고 충격적이었는데. 영화도 그럴까?"
"이 영화 첫 장면 보니깐 진짜 답답할 것 같긴 하다. 여주인공이 벌써 한숨 쉬잖아! 근데 이 영화 충격적이야?"
"음... 충격적인 장면이 없다는 게 오히려 충격적이야. 김지영이 겪는 일들이 뭔가 엄청 놀랄만한 일들이 아니거든. 한번쯤 경험해보고 한번쯤 목격해본 일들인데 그걸 모아놓으니 진짜 답답해지고, 일상적인 일들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했구나 싶어서 충격적이었지."
"오, 나도 같이 보자."
"나 이 영화 보니까 엄마 많이 생각난다."
"나도."
"명절 때 정말 그랬는데. 엄마는 하루종일 부엌에서 일만 하고. 근데 그걸 당연하게 생각했던 것 같아."
"나도 그래. 그때 엄마가 무슨 생각을 했을지, 어떤 마음이었을지 생각해 본 적이 없네."
김지영이 혼자 정신없이 아기를 보고 집안일을 하거나, 남편의 가족을 위해 명절날 힘들게 요리를 하고, 아이때문에 하고싶은 일을 하지 못하는 장면들... 엄마에게 미안한 마음이 든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이 영화가 그렇게 논란이 많은 이유도 이런 죄책감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집안에서 엄마는 힘든 일을 도맡아하고 다른 사람들은 그걸 당연하게 생각했다. 영화를 보고 나서야 떠오른 미안한 마음과 죄책감은 불편한 감정으로 나타나고, 불편한 감정은 종종 공격으로 변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82년 김지영 책을 읽었다는 이유만으로 여배우나 아이돌이 악플을 받았다는 기사도 읽었다.
김지영은 아기를 키우기 위해 직장경력을 희생하고, 애기 데리고 나가서 커피 한잔 마셨다고 맘충이라는 소리를 듣는다. 명절이면 남편의 가족을 위해 하루종일 일하고, 청소하고, 아이 목욕시키고, 요리하고, 빨래하고... 집안일은 끝이 나지 않는다. 이 장면에서 남친이 한 마디 했다.
"넌 나 안만났으면 다른 남자랑 결혼했겠지?"
"글쎄. 결혼 안했을 수도 있지!"
"넌 결혼했을 것 같아."
"어떻게 알아, 모르는 일이지."
"한국에서 살았으면 너도 비슷하게 살았을까?"
아마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한국에서의 직장생활을 생각해보면 비슷한 일이 있었고, 아기를 낳은 친구들을 생각해봐도 그렇다. 영국에서 석사 유학을 하고, 서울대에서 박사과정까지 밟은 언니도 결혼하고 나서 아기를 낳고 일하지 못해 우울증이 왔다. 석사과정까지 상담심리학을 전공한 친구도 아기를 둘 키우느라 일을 못하고... 쟁쟁한 기업에 들어간 친구들도 아기가 생기면 일을 그만두었다. 그렇게 열심히 공부했는데, 얼마 못하고 그만둬야 하다니.
하지만 이 영화에는 악역이 없다. 김지영이 겪는 힘든 일들이 어느 한 개인의 잘못이 아니라는 소리다. 그래서 김지영에게 미안하게 느끼면서도, 딱히 소매 걷어부치고 직접 김지영의 고단함을 덜어준 경험이 없었다는 점에서 공감을 불러 일으킨다. 김지영의 남편(공유 역)처럼 걱정하고 미안해하긴 하지만 '병원 가보라'는 말 이외에는 딱히 해줄 것이 없다는 것도 그렇다.
김지영의 남편은 김지영을 위해 육아휴직을 알아본다. 그렇지만 육아휴직을 쓴 다른 부서 직원이 승진에서 밀리고, 책상이 깨끗하게 정리되었다는 말을 듣자 직장동료는 이런 말을 한다.
"아~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대체 어쩌라는 거야."
대체 어쩌라는 거야. 이 말이 한국사람들이 보는 현실이 아닐까 싶다. 대체, 어떻게 살아야 할까?
시원한 결말은 없다. 하지만 당연하게 생각했던 개인의 희생을 문제라고 생각했다는 것만으로 시작이 아닐까 싶다. 문제인 것을 깨닫고 모두가 행동을 바꾸고 배려한다면 더욱 좋겠다. 영화 포스터에 쓰인 "모두가 알지만 아무도 몰랐던 이야기"라는 말이 깊게 남는다. 모두가 알지만, 모두가 함께 모른 척 덮었던 이야기 아니겠는가.
"이 영화 어떻게 생각해?"
"꼭 봐야 한다, 이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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