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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쳐리뷰/책 리뷰

천선란, <어떤 물질의 사랑> - 세상을 바라보는 깊은 시선

by 밀리멜리 2020. 10.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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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단편인 <사막으로>를 읽다 보면 작가가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가 싶어 몰입이 된다. 사우디 아라비아로, 에콰도르로 일하러 떠나는 아버지를 보고, 작가는 사막을 상상한다. 사막의 밤하늘에서 빛나는 별. 고독한 사막과 그보다 더 외로운 별과 지구 사이의 우주를 유영하는 주인공. 갑자기 우주? 아하, 이 책, 에세이가 아니라 SF 소설이었지.

 

망망대공을 떠다니는 주인공이 우주 비행사가 된 것은 아버지와의 대화 때문이었다. '사막에 대해 글을 써보는 것이 어떠니', 하고 아버지가 아파트 베란다에서 내뱉은 말이 빛의 속도로 우주를 유영하다 주인공에게 닿는다.

 

우리가 내리는 선택은, 시시각각 외부 자극과 과거의 경험에 영향을 받는다. 작가 천선란이 <사막으로>에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과거에 무작위로 겪었던 사건들이 덧없이 떠다니다가, 우리가 선택을 내릴 때 빛의 속도로 우리를 찾아와 닿는 것만 같다.

 

다음 <너를 위해서> 단편은, 꿈꾸듯 글을 읽던 나에게 찬물을 끼얹는 것과 같은 충격을 주었다. 먼 미래가 되어, 사람이 직접 출산을 하지 않고 인큐베이터가 배아부터 길러내는 시대가 올지도 모르는 일이다. 천문학적인 돈이 들지도 모르는, 이 대리 출산 기계를 이용하려면 자격을 갖춰야 할 것이다. 아이를 갖는다는 건 엘리트만이 할 수 있는 일이 될지도 모른다.

 

적당한 재산과 직업이 있다고 아무나 아이를 낳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아이를 기를 만한 인성과 교양을 갖춰야 할 것이다. 범죄자보다, 다정하고 능력있는 사람의 유전자를 남기는 것이 더 인류를 위하는 일이 아니겠는가? 병이 전해지지 않도록, 몸도 건강해야 한다. 그런 조건을 갖추지 못한다면, 아이를 가질 자격이 없는 시대가 올지도 모른다는 작가의 글에 나는 깜짝 놀랐다. 정말 그럴지도 모르지.

 

어떤 물질의 사랑, 천선란.

 

이렇게 세상을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은 인간에게만 머물지 않는다. <마지막 드라이브>에서, 자동차 연구원들은 인간의 수명을 늘리기 위해 인공지능 로봇이 사랑을 하도록 만들고, 149번이나 충돌 사고 시뮬레이션을 돌려 그 로봇이 스스로 희생하도록 만든다. 잔인한가? 149번씩이나 자기 몸을 희생해서 대신 죽는 로봇으로 시험하는 것이? 0과 1로 만들어진 기계신호가 사랑을 하다 죽는 것이 안타까운가? 

 

<마지막 드라이브>의 주인공과 마찬가지로, 나는 이 로봇에 대해 어떤 가치판단도 내릴 수가 없다. 안타까운 마음이 들지만, 기계이니 안타까워하지 않아도 될 것 같고, 하지만 자기 몸을 매번 희생하는 이 로봇을 보고 무덤덤해질 수도 없다. 생명이 있는 것만 존중을 받아야 할까? 그렇다면 이 로봇이 가지는 감정은 무엇인가? 

 

이 책에서 펼쳐지는 SF적인 소재들은, 그냥 허무맹랑하게 하늘에서 뿅하고 나타난 것들이 아니다. 작가는 매일 매일의 일상을 다정한 시선으로, 하지만 멀리서 관찰하며 발견해낸 것들에 우주라는 색채를 입혀 묘사한다. 그래서 이 책을 읽다보면 소설이 아니라 작가의 하루 일상에 관한 에세이처럼 느껴지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여러 사건을 바라보는 시선이 얼마나 깊고 세심한지, 작가가 대부분의 시간동안 상상하고, 늘 무언가를 쓰고 있다는 말이 진정으로 느껴진다. 매 순간 상상하지 않으면 어떻게 이런 글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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