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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쳐리뷰/책 리뷰

셰익스피어, <루크레티아의 능욕> - 연옥과 지상의 사이에서

by 밀리멜리 2020. 10.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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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는 글을 쓰는 행위가 심리치료보다 더한 치유를 선물한다고 했다. 나는 그걸 믿어보기로 한다. 하지만 쓰면 쓸수록 이상하게도 나는 캄캄한 나락으로, 불 같은 연옥을 지나, 소용돌이같은 심연의 슬픔에 빠진다. 심연이 시작되는 곳, 림보에서 능욕을 당했던 루크레티아가 허우적거린다. 아름다운 루크레티아. 그녀의 피부가 너무도 희고 투명해서 피가 푸르게 보인다고 했다. 푸른 피는 셰익스피어의 노래를 거쳐 고결해지고, 블루블러드는 고귀함의 상징이 되었다. 그러나 루크레티아는 언제쯤 슬픔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기원전 509년, 고대 로마의 왕자 섹스투스는 전쟁터에서 귀족, 장군들과 연회를 벌이고 서로 자신의 부인이 가장 정숙하다고 자랑한다. 장군 콜리타누스는 자신의 부인이 가장 정숙하다고 자신하며, 왕자와 내기를 벌인다. 전쟁이 끝나고 로마로 돌아와 귀족들은 과연 누구의 아내가 정숙한지 내기 결과를 확인하려 한다. 과연, 대부분의 여자들은 유흥을 즐기고 있는 반면 루크레티아만이 홀로 시녀들과 자수를 놓고 있었다.

 

루크레티아의 덕망과 미모에 반한 로마 왕자는 그녀를 강제로 겁탈하고, 이에 응하지 않으면 '루크레티아가 하인과 간통한 것을 발견해서 둘 모두를 죽였다'라고 소문을 낼 것이라 협박한다. 하인의 목숨을 살리고 명예를 지키기 위해 그녀는 이에 응하고, 다음 날 가족들 앞에서 이를 폭로한 뒤 자살한다. 

 

베첼리오 티치아노 - 루크레티아의 자살

이 사실을 알게 된 가족들과 로마 귀족, 시민들은 분노한다. 그 분노는 봉기로 이어져 로마의 왕정이 무너지고 공화정을 수립하게 된다. 그래서 루크레티아는 고대 로마에 공화정을 가져온 인물로 평가된다.

 

왜 우리는 분노하지 않는가? 고대 로마가 아무리 타락하고 성생활이 문란한 사회였다고들 하지만, 왕자가 장군의 아내를 겁탈한 것에 대해 분노할 줄 알았다. 너무도 분노한 나머지 로마 시민들은 왕정제도를 버렸다. 그 분노가 림보에 머물러 있는 루크레티아를 조금이나마 위로해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왜 우리는 눈앞에서 자행되고 있는 능욕을 보고 즐기는가. 마땅히 분노해야 할 것에 왜 분노하지 않는가? 2500년의 시간이 흐르고 흐르며, 무엇이 잘못되었길래 우리는 로마 사람들보다 더 잔악해졌을까? 

 

“치욕도 명예도 없이 살아온 사람들의 슬픈 영혼들이 이렇게 비참한 꼴을 당하고 있다. 하느님께 반항하지도 복종하지도 않았고 단지 자신에게만 충실했던 저 사악한 천사들의 무리도 섞여 있다. 하늘은 그들을 쫓아냈다. 그들이 하늘의 빛을 가릴 테니까. 그러나 깊은 지옥도 그들을 거부하니, 그들을 보고 지옥의 자들이 우쭐해 할까 두려웠기 때문이지"

<신곡 – 지옥편>, 단테 알리기에리, 박상진 역, 민음사, 2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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