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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쳐리뷰/책 리뷰

킴 투이, <루> - 전쟁과 피난의 시련에도 초연하고 낙관적인 시선

by 밀리멜리 2020. 10.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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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내가 한창 어학원에서 프랑스어를 배우고 있을 때, 프랑스인 선생님이 추천해 준 책이다. 이 책은 출간되자마자 퀘벡과 프랑스에서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캐나다의 '총독문학상', 프랑스의 '에르테엘-리르 대상(Grand prix RTL-Lire)' 등을 수상한 작품이다. 

 

킴 투이, <루>

 

책을 펴면 첫 장부터 강렬한 이미지가 펼쳐진다. 

 

나는 원숭이해가 시작되던 구정 대공세 동안, 집앞에 줄줄이 걸어놓은 폭죽이 터지는 소리와 기관총 소리가 한데 어우러져 울려 퍼지던 때에 태어났다.

내가 세상에 온 날 사이공의 땅은 폭죽이 터져 수천개로 조각난 잔해들로 물들었다. 버찌 꽃잎처럼 붉은 빛이었고, 둘로 갈라진 베트남의 마을과 도시에 흩뿌려진 2백만 병사들이 흘린 피처럼 붉은빛이었다. 

나는 불꽃이 터지고 빛줄기가 화환처럼 펼쳐지고 로켓과 미사일이 날아다니는 환한 하늘의 그림자에서 태어났다. 나의 탄생은 사라진 다른 생명들을 대신하는 의무를 지녔고, 나의 삶은 어머니의 삶을 이어갈 의무를 지녔다.

 

작가는 시적이고도 아름다운 표현을 썼지만, 그 전쟁통 속의 순간을 놓치지 않고 예리하게 묘사한다. 탄생부터 시작된 이 이야기는 전쟁에 나가는 군인들 뿐만 아니라, 전쟁 후에 고통받는 사람들, 남편이나 아이들을 잃은 여자들을 담담하게 그려낸다. 

 

전쟁 난민으로서 주인공은 캐나다 퀘벡으로 피난을 오게 된다. 피난민 캠프에서의 처절한 삶, 웅크리며 살아야 했던 보트 안에서의 끔찍한 생활, 캐나다에 와서 만나게 된 낯선 이방인으로서의 삶과 친절한 사람들을 의연하게 그려낸다. 

 

인용구의 마지막 문장에서 작가가 "다른 생명들을 대신하는 의무를 지녔고, 나의 삶은 어머니의 삶을 이어갈 의무를 지녔다"라고 쓴 것은 아마도 그렇게 소리없이 사라져간 역사의 희생자들과 전쟁을 겪어야 했던 어머니들의 삶을 알려야 겠다는 의무감이었을 것이다.

 

킴 투이, <루>. 밑줄치고 싶은 문장이 많다.

이 책이 다른 전후소설과 다른 점이라면, 그렇게 끔찍한 삶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불쌍히 여기거나 희생자들에게 연민의 시선을 보내지 않는다는 점이다. 눈앞에 펼쳐진 상황은 객관적으로 봐도 끔찍하지만, 작가는 그를 초연하게 바라보고 있다. "인생이라는 싸움에서 슬퍼하면 진다"라는 베트남 속담처럼, 작가는 어느 상황에서나 낙관적이다.

 

피난민 캠프에서 임시 거처를 세우고 생존하던 어느 날, 밤비가 내린다. 밤비가 지붕을 때리고 잔가지와 나뭇잎을 타고 흐르는 소리를 들으며, 작가는 어느 음악가라도 그렇게 아름다운 소리를 듣는다면 그 오케스트라의 소리를 귀기울여 들을 거라고 말한다. 어느 안무가라도, 어느 영화제작가라도 그 장면을 놓치지 않을 거라고 표현하는 부분이 감명깊었다.

 

아무리 지금 삶이 힘겨워도, 그 속에서 아름다움과 행복을 찾아내는 모습이 읽는 사람을 감동시킨다. 그러면서도 베트남을 오랫동안 식민지로 삼았던 프랑스의 제국군들, 월남 전쟁을 치뤘던 베트공과 미군이 떠올랐고, 그곳에 한국군도 있었겠지 하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이 책 어디에도 미움은 없다.

 

킴투이 <루>. 문학과지성사 출판.

짧은 프랑스어로 책을 읽느라 시간도 오래 걸리고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도 많았는데, 한국어본으로도 더 자세하게 읽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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