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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쳐리뷰/책 리뷰

히가시노 게이고, <11문자 살인사건> 의 설정이 억지스러운 이유

by 밀리멜리 2020. 10.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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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도서관을 둘러보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추리소설이 대출가능이길래 별 생각없이 바로 대출해서 읽었다. 이 작가의 소설을 많이 읽은 편은 아니지만, 읽을 때마다 어느 정도 만족감을 주는 편이다. 작가 이름만 보고 선택해도 실패하는 경우가 별로 없이 즐겁고 빠르게, 몰입해서 읽어나갈 수 있다는 점이 장점이다. 

 

하지만 이 <11문자 살인사건>은 내가 읽어온 작가의 다른 작품과는 조금 달랐다. 뭔가 설정이 억지스럽다는 느낌을 받았다. 다른 소설들은 억지스럽다는 느낌을 받기도 전에 궁금해서 책장을 넘기게 되는 페이지터너였다면, 이 소설은 '주인공이 왜 이렇게까지 행동하는 걸까? 너무 오지랖 부리면서 사건을 파헤치는 것 아냐?' 싶은 생각이 들었다.

 

예를 들어, 주인공은 추리소설 작가인 여자이다. 2개월동안 가볍게 만난 애인이 갑자기 살해당했는데, 자신이 수상하다고 생각하는 사건들을 경찰에게 하나도 알리지 않고 무모하게 추리를 해나간다. 애인이 1년 전 떠났던 요트여행에 참여한 사람들이 수상한 것을 알아내고, 그 사람들에게 접근해 자신도 요트여행에 참가한다. (!)

 

 

내 애인을 죽였을지도 모르는 사람들과 외딴 섬으로 요트 여행을 간다?

 

 

아니 나라면, 절대로 그런 수상해 보이는 여행에 안갈텐데, 여주인공은 살해 협박을 받으면서도 그 여행에 기어코 참가한다. 뭐, 추리소설 작가에다 2개월밖에 만나지 않은 애인을 엄청 사랑했다면, 그렇게 무모해질 수도 있는 것일까? 그것도 여자의 몸으로 그런 수상쩍은 여행에 참가한다고? 아무래도 억지스럽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나는 범인이 궁금해서 계속 읽어 나갔다.

 

중반부로 들어와서, 나는 이 책의 설정이 왜 억지스러운가 조금은 이해하게 되었다. 이 요트여행에 참가한 열몇 명의 사람들은 어느 작은 섬의 리조트에서 머물게 되는데, '수상하고 낯선 사람들이 외딴섬의 리조트에서 한명씩 죽어나간다'라는 플롯은 그 유명한 애거서 크리스티의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를 연상시킨다. 이 소설에서 중반부터 진행되는 리조트 이후의 스토리는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의 오마주인 것 같다. 그 플롯을 만들어 내기 위해, 여주인공은 아무래도 좀 억지스럽게 행동할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그 플롯뿐만 아니라, 소설 내에서 일어나는 살인사건에 대한 모티브도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의 살인 모티브와 비슷하다. 그 모티브를 여기서 설명하면 스포일러가 될 것 같다. 이 책의 표지에는 "그 살인은 올바른 선택이었습니다"라는 인용구가 쓰여 있는데,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에서 범인의 살인동기도 이와 비슷하다.

 

그런 점에서 애거서 크리스티의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는 역시 명작이다. 이 소설은 너무 재밌어서 계속해서 범인이 누구일지 추측하며 읽게 되는데, 무엇을 추측하든 다 퇴짜를 맞고 나중에 반전을 알고 나면 '우와! 이게 뭐야! 말도 안돼, 이걸 몰랐구나!'하는 말이 절로 나오게 될 것이다.

 

<11문자 살인사건>은 우리나라에서는 비교적 최근 출판되었지만 원래 일본에서는 1987년에 첫 발행된 소설이다. 이 작가의 초기작이었기 때문에, 애거서 크리스티 류의 정통추리소설에 많은 영향을 받은 것 같다. 역시 아류작은 원조를 뛰어넘을 수 없지. 게다가 87년에 나온 소설이라면, 최근 발표한 베스트셀러들과 많이 다른 점이 이해가 간다.

 

 

히가시노 게이고, <11문자 살인사건>

 

 

아무튼, 나는 추리소설을 즐기는 편이지만 소설의 범인을 예측해서 맞힌 적이 한 번도 없다. 나는 정말 매번 틀린다. 작가들이 만들어낸 뻔한 트릭에도 나는 번번히 속는다. 하지만 그렇게 잘 속아넘어가기 때문에, 마지막에 뒤통수를 때리는 반전을 즐길 수 있는 것 같다. 이번에도 억지 설정이라고 불평해 놓고는 범인을 하나도 못 맞췄다. 그렇지만, 내 추리가 틀리기 때문에 오히려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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