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을 한지 일주일이 지났다. 지금까지는 그냥 꿔다놓은 보릿자루마냥 가만히 사무실에 앉아 있는 거나 마찬가지였는데, 오늘은 정말 바빴다.
퀘벡 업무문화는 '스스로 알아서 하기', '모르면 어떻게든 해결하기'라는 정신이 중요하다. 구인 공고를 봐도 꼭 들어가는 항목이 이것이다.
오늘은 정말 그렇게 강조하는 자율성이 발휘된 날이었다. 오늘 아침에는 '회사 웹사이트에 파일 업로드 하는 법' 연수를 받았는데, 이 연수도 그냥 해주는 게 아니라 여러 사람에게 물어물어 찾아서 마지막에 겨우 등록한 세션이다. 화상으로 한창 연수를 듣고 있는데, 쟝이 날 부르더니 오늘 오후에 회의에 참석해서 회의록을 쓰라고 부탁했다.
아! 회의라니!
바로 오늘 오후라구요? 그걸 왜 당일 아침에 알려주나요 😭 최소한 지난 회의록 볼 시간은 있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연수를 듣는 둥 마는 둥 하면서 지난 회의록을 찾았다. 귀로는 연수를 듣고 눈으로는 회의록을 보고... 그러다 깨달았다. 나는 멀티태스킹 안되는구나. 듣기와 읽기를 동시에 할 수는 없다.
회의록 쓰는 게 내 일인 건 알고 있었지만, 아직도 프랑스어가 편하지 않고 무엇보다도 어려운 용어가 많다. CIS, MSA, DI, DAM 등등 왜 그렇게 약자들을 많이 쓰는지... 이런 내 사정을 아는 쟝은 내년에나 회의에 참석할 거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는데, 의회장 비서인 다이앤이 원래 자기가 들어갈 회의에 나를 쓱 추천했던 것이다. 다이앤은 오늘 내내 보이지 않았다.
다이앤!!!! 회사 나올 날 10일도 안남았다고 '난 몰라~'를 반복하더니 결국 내가 제일 어려워하는 일을 넘겨버렸다. 지금까지 날 많이 도와줘서 고마웠지만 오늘만큼은 좀 울고 싶었다. (이제 와 생각하니 차라리 다이앤이 있을 때 이런 일을 맡아서 다행이다. 다이앤 없으면 물어볼 사람도 없고...😥)
대망의 회의시간이 올 때까지 걱정이 한가득이었지만, 딱히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쟝도, 크리스틴도 나에게 걱정말라고 해주었다. 회의시간이 다가오고, 의회장마저 나에게 '처음이라 어려울 텐데, 회의 참석자 모두가 도와줄 테니 걱정말라'라는 말을 계속 해주었다.
회의가 시작되고, 패닉의 연속이었다. 정말 정말 무슨 말 하는지 하나도 이해하지 못했다. 내가 뭘 쓰고 있긴 한데 그냥 들리는 단어만 쓴 것이라 노트를 봐도 뭔소린지 모를 랜덤한 단어들만 가득했다. 너무 어려워서 그냥 다 놓고 싶었다. 이러다 망하겠다 싶어서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에 말을 꺼냈다.
"이 회의 녹화해도 될까요? 나중에 회의록 쓸 때 다시 보려구요."
"그래, 당연하지."
화상 회의여서 살았다. 녹화 버튼을 누르고 나니 뭔가 든든했다. 그렇지만 내가 녹화 파일을 못 찾을 수도 있고, 오류가 날 수도 있어서 마음은 놓지 못했다. 그러면서 내 손은 뭔지 모를 단어들을 노트에 계속 적어나갔다.
그렇게 회의가 끝났다.
다행스럽게도, 쟝이 나를 위해 처음 부분을 노트해 주었다. 정말 너무 고마웠다. 다만 글씨 알아보기가 너무 힘들었다...
"회의 괜찮았어?"
"하하하, 안 괜찮아요."
"너무 걱정하지 마, 도와줄 테니까. 녹화파일 어딨는지 알아?"
"지금 찾아보려구요. 음... 검색하니 나오네요!"
녹화파일을 다시 들으니 다행스럽게도 이해가 갔다. 물론 두번 세번 돌려봐야 했지만,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으니 그제서야 좀 마음이 놓였다. 벌써 프랑스어 좀 늘은 것 같다!
"어휴! 다시 보니 나 완전 졸고 있구만!"
"앗, 그러네요 😆😆"
"이거 다 쓰면 녹화파일 지워야 해, 알겠지?"
"당연하죠. 이 파일 시간 지나면 자동으로 지워진대요."
"좋아, 좋아. 내일 아침에 와서 천천히 쓰고, 이제 집에 가!"
"이것만 잘 되나 보고 갈게요."
"불쌍해라. 난 먼저 간다. 내일 봐!"
"내일 봐요!"
신기하게도 제일 어렵다고 생각한 일을 하고 나니 마음이 편해진다. 눈이 좀 피곤하긴 하지만, 이제 일을 잘 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조금씩 생겨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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