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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트리올 생활/공무원 이야기

빨리빨리 한국인이 느긋한 행정기관에서 일하며 느낀 점

by 밀리멜리 2022. 2.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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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긋한 퀘벡 공무원으로 일하면서 발견한 점이 하나 있다. 나는 정말 빨리빨리를 좋아하는 한국인이구나! 한국에서 오래 살아온 나로서는 이미 빨리빨리가 습관화가 된 것 같다.

 

요즘은 사무실에서 차를 자주 마신다. 찻물을 끓이려고 공용 테이블의 전기포트 앞에서 물을 올리고 기다리고 있으면, 누군가가 와서 이렇게 말한다.

 

"물 끓이는 거 기다리는 거야? 성급하네! 빨리 먹고 싶은 거구나?!"

 

하하 웃으며 그렇다고 대답하긴 했는데, 생각해보니 공용 전기포트나 전자레인지, 커피머신 앞에서 기다리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걸 깨달았다. 대충 버튼을 눌러놓고 딴 걸 하고 오다가 생각나면 다시 찾으러 온다. 

 

전기포트에 물 끓이는 게 2~3분밖에 되지 않으니 그 앞에서 기다리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는데, 퀘벡 사람들은 그걸 기다리는 걸 보고 성급하다(impatient)고 느낀 모양이다. 

 

물 끓이는 거 기다리니?

 

나는 원래 빨리빨리 확실하게 되지 않으면 조금 스트레스를 받곤 했다. 특히나 해야 할 일이 밀리거나 바로 끝낼 수 없다고 생각하면 좀 불안하다. 이전에 샌드위치 가게에서 알바를 할 때도 손님이 많아 주문이 밀리면 난 정신없이 샌드위치를 만들어내고, 손님들이 기다리는 걸 보고 있으면 조급해졌다. 그걸 보고 내 동료가 항상 물었다.

 

"넌 왜 그렇게 스트레스받고 있니? 이게 뭐 큰일이라고."

 

이렇게 조급한 성격은 조금씩 나아졌다만, 그래도 빨리빨리 하는 습관은 아직 남아있다.

 

손님들이 밀려들면?

 

어제는 마담 나탈리가 서류에 마무리를 해달라고 부탁했는데, 그걸 10분 만에 해서 돌려줬더니 감동한 것 같았다. 답장 메일로 메르씨(고맙다)라는 말이 세 번이나 들어갔으니 말이다.

 

공무원 환경이니 일을 천천히 하는 게 매우 자연스럽다.

 

예를 들어, 새로운 진료실에 의료기구가 필요해 물건 구입을 진행하려고 한다. 그럼 누가 담당할지 정하고, 무슨 물건이 필요할지 리스트를 만들어 보건복지부에 보내 예산을 받아야 한다. 이런 걸 의논하기까지 5개월이 넘게 걸린다.

 

"침상 발받침도 필요한가요? 체중계는 어떤 형태가 좋죠?"

"그건 내 담당이 아니에요, AA에게 연락하세요."

"AA, 이 문제를 논의하고자 당신의 지식이 필요합니다."

"AA는 3주동안 휴가입니다. 급한 상황이라면 BB에게 연락하세요."

 

(3주 후)

 

"보건복지부의 레터를 보면 예산이 이 정도네요. 오후에 잠깐 통화 가능할까요?"

"오늘 오후에는 시간이 안 되니, 다음 주 월요일 오전에 통화하죠."

 

(한 달 후)

 

"다들 새해 잘 보냈나요? 이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회의를 한번 해야겠네요. 다들 언제 시간이 나나요?"

"모두가 비는 시간을 찾지 못해 회의를 2주 후로 미룹니다."

 

이런 메일을 주고받으며 5개월이 흘렀다. 이 프로젝트는 진행 중이고, 의료기구는 아직도 못 샀다.

 

처음엔 왜 이렇게 늦나 싶었는데, 이것은 모두 불확정성 회피(Avoiding uncertainty) 성향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물건이 정확한지, 담당자는 확실한지, 그 과정안에 있는 모든 불확실한 것들을 회피하고자 천천히 확인하며 하는 걸 좋아한다. 심지어 15분짜리 통화를 위해서도 그 사람이 통화 가능한지를 미리 확인한다!

 

그래서 언제 된다고요?

 

한국 사람도 불확정성 회피 성향이 있지만, 그 형태가 다르게 나타난다. 문제 상황에서 빠르게 해결책을 찾으려 하며, 눈앞에 당장 닥친 일을 빠르게 처리하고 싶어 한다. 나도 그렇다.

 

가끔 여기 사람들 일하는 걸 보면 '오, 이렇게 이렇게 하면 더 빠를 텐데' 하는 걸 느낀적이 있다. 하지만 이곳 사람들은 굳이 그럴 것 까지야? 하고 생각하는 듯하다. 그냥 주어진 일만 잘하면 되지. 덕분에 나도 한시름 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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