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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트리올 생활/캐나다 맛집탐방

에클레어에 얽힌 기억

by 밀리멜리 2022. 5.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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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몬트리올에 도착한 지 얼마 안 되어서의 일이다. 당시 어학원에 등록해서 학생비자 신분으로 있었기 때문에, 돈을 아껴야 한다는 생각에 가득 차 있었다. 내가 가진 비자는 알바를 할 수 없는 비자였고, 한국에서 벌어온 돈을 까먹으면 안된다는 생각에 자유롭게 뭘 사먹는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거기다 아토피로 피부상태도 좋지 않았기 때문에 한동안 먹는 걸 제한했는데, 그러다보니 먹는 것에 집착이 생겼다. 피부때문에 못 먹고, 돈 때문에 못 먹고... 😫 그러다 싸구려 도넛이라도 먹으면 죄책감이 들었다.

 

어학원 수업이 끝나면 매일 빈 교실에 혼자 남아서 공부를 하곤 했다. 다들 몬트리올의 여유로운 오후를 즐기러 가는데, 나는 뭔가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생각에 아득바득 공부했다. 뭐 아무튼, 한국에서 일하던 것보다는 프랑스어 공부가 훨씬 재미있었고 덕분에 실력이 금방 늘었으니 후회는 없다.

 

 

거의 혼자 있었지만, 베트남에서 온 후이라는 같은반 남자애가 이따금 함께 남아서 공부하고는 했다. 후이는 프랑스어를 원래부터 잘해서 공부자극이 되었다.

 

어느 날 오후, 후이가 공부하다 말고 말했다.

 

"우리 너무 배고프지 않아? 뭐 먹으러 가자."

"오, 좋지! 안그래도 지루했는데."

"내가 잘 아는 불랑제리(빵집)가 있어."

 

그래서 후이를 따라 근처의 불랑제리에 갔다. 프랑스식 빵과 케익이 유명한 곳이었는데, 유리 진열장에 크로와상과 쇼콜라틴, 각종 이름 모를 빵들이 있었다.

 

"여기는 에클레어가 맛있어."

"에클레어가 뭔데?"

"이거."

에클레어

 

에클레어는 바삭바삭하고 길쭉한 페이스트리 안에 크림을 넣고 위에 초콜릿이나 크림, 과일로 장식한 빵이다. 너무 예쁘고 맛있게 생겼다. 발음에 따라 에클레르, 에끌레르, 에끌레어라고도 부른다. 에클레어는 번개/섬광이라는 뜻인데, 그만큼 맛있어서 후딱 빠르게 먹는다는 뜻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생전 처음 보는 예쁜 빵에 감탄하고 있는데, 후이는 집에 가서 더 먹을 거라며 에클레어 3개를 주문했다. 점원이 집게로 에클레어를 하나씩 상자에 담아 포장해 주었다.

 

나는 후이가 다른 곳을 보고 있을 때 프랑스어로 더듬더듬, 에클레어가 얼마냐고 점원에게 물었다.

 

"꽁비앙 싸 꾸뜨? (이거 얼마예요?)"

"시스 에 꺄롱쌍크 돌라. (6.45달러요.)"

 

소수점 숫자를 못 알아들었지만 맨 앞자리 시스(six)는 알아들었다. 6달러가 넘는다고?!!! 저거 하나에?

 

나는 그냥 군침을 흘리며 다음 기회에 사먹기로 했다. 에클레어 3개면 택스 포함 2만원이 넘는다.

 

"넌 안 사?"

"나? 괜찮아, 뭐..."

"에클레어 먹어보지 그래?"

"음.. 다음에."

 

새삼 2만원어치 빵을 아무 생각 없이 사는 후이에게 놀랐다. 그런데 알고 보니, 후이는 매우 부자였던 모양이다. 어학원 근처 시내 중심가에 위치한 화려하고 넓은 콘도에 렌트를 얻고, 미국 대학의 박사과정을 시작하기 전에 잠깐 놀러 몬트리올에 온 것이다.

 

그날 조금 서러워지며 나도 먹고 싶은 걸 맘대로 사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후이는 내가 돈을 아끼느라 에클레어를 사먹지 못했다는 건 몰랐을 것이다. 후이가 나를 몰래 좋아했다는 사실은 후이가 미국으로 떠나기 전에서야 알게 되었다. 하지만 나는 이미 남친도 있었고, 떠나기 전 고백해봐야 뭐... 그냥 좋은 추억으로 남았다. 

 

아무튼 이날까지도, 나는 에클레어의 모습만 보고 한번도 사먹어 본 적이 없다. 그러나 오늘!! 나는 회사 앞 에클레어 전문점에 에클레어를 사러 갔다.

 

에클레어 전문점 '레클레시'

사실 이 가게는 우리 회사 사무실 이전한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구글 지도 켜서 검색한 맛집이다. 별점도 5점 만점에 4.7로 무척 높다.

 

 

이게 다 에클레어라니!! 우와!

 

 

종류가 너무 많아서 못 고를 것 같다.

 

점원 찬스를 쓰려는데 점원 언니가 넘 예뻐서 놀랐다...😅 예쁜 언니가 예쁜 가게에서 예쁜 빵을 파시네요...

 

"너무 많아서 못 고르겠어요. 어떤 거 추천해 주실래요?"

"여기 피스타치오에 산딸기 올라간 게 많이 달지 않아서 잘 나가고요, 그 옆에 카라멜 들어간 건 무척 달아요. 제가 제일 좋아하는 건 '륜드미엘(밀월여행)'인데요, 이름처럼 꿀이 들어가 있어요. 여기 이건 유자 크림이 들어가서 맛있고요."

 

유자크림 에클레어, 랑뚜샤블

 

"음, 그럼 달지 않은 거, 피스타치오 크림 두 개 주세요."

"두개만요? 지금 새로 나오는 게 있는데, 더 필요하지 않으세요?"

"괜찮아요."

 

샀다! 에클레어!

하나는 내일 생일인 쟝의 생일선물로, 하나는 나 자신에게 선물... 🎁 생일 땐 함께 밥먹고 딱히 선물하지 않아도 되는데, 쟝이 내게 만화책을 선물해 주었으니 그래도 보답해야겠다 싶다.

 

피스타치오 산딸기 에클레어

집에 와서 하나는 개봉! 

 

한입 베어물어 보니 속에 크림이 부드럽게 흘러나온다. 이게 무슨 크림이지? 아무튼 점원 말처럼 많이 달지 않고 맛있다. 산딸기는 새콤하고, 초콜릿은 달달하다.

 

그런데... 세 입 먹으니 끝난다. ㅎㅎㅎ...

 

에클레어 역시 사치스럽구만! 이것이 월급받는 자의 자유로움이다.

 

짧아서 더 아름다운? 에클레어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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