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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트리올 생활/한국어수업

숙제를 안하는 아이에게 뭐라고 할까?

by 밀리멜리 2022. 5.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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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에는 마리-크리스틴과 이런 대화를 나눴다.

 

"이번 주말엔 뭐해?"

"글쎄... 금요일 저녁엔 날씨 좋으니까 좀 돌아다닐 거고, 토요일에는 운동 좀 하고, 운동이라니 좀 지루하지? 그리고 일요일에는 집안일 하려고 해. 넌?"

"글쎄.. 나는 토요일에는 학생들 가르치는데. 아이들에게 한국어 가르쳐. 캐나다에서 나고 자란 한국 아이들."

"오, 그렇구나. 봉사활동이야?"

"아니, 봉사활동 아니고 일 하는 거야."

"아, 또 일이라니! 월화수목금 일하고 토요일에 또 일?! 참 대단하다. 괜찮아?"

"좀 지치긴 하는데, 그래도 애들 가르치는 건 재밌어."

 

내 솔직한 심정이다. 애들 가르치고 한국어로 함께 책 읽고 이야기하는 건 재밌다. 아이들도 재밌어하고, 그러다보면 보람도 느껴진다. 다만 수업을 하기 전이나, 수업 외 활동이나 교사 연수, 미팅 등이 있어서 그걸 준비해야 하는 경우가 좀 지친다.

 

금요일 밤!

무엇보다도 금요일 밤에 주말밤을 맘껏 누리지 못한다는 점이 그렇다. 다음 날의 수업준비를 해야 하고, 숙제를 챙기고 하다 보면 금요일 밤에도 나가서 한 잔 한다거나 할 수가 없다. 한국에서 강사일을 할 때도 토요일 아침에 수업이 있어서 금요일 밤 친구들과의 모임 자리에서 금방 자리를 떠야 했다.

 

벌써 강사 경력이 10년차 되어가는데, 수업 전 잘하고 싶은 마음이 아직도 크다. 그러다 보니 걱정도 많다. 그런 부담감들이 조금씩 쌓이고, 금요일까지의 피로도 조금씩 쌓인다.

 

즉각적인 보람이 생기는 선생님이라는 직업

그래도 수업을 계속 하는 이유가 있다. 나를 정말 좋아하고 의지해주는 아이들 덕분이다.

 

어느 새 아이들과 두 학기째 수업을 하고 있는데, 그 사이에 아이들이 많이 변했다. 키도 자랐고, 한국어도 술술 더 잘 읽고, 이해도 잘하고, 생각의 폭이 넓어지는 것만큼 마음도 넓어졌다. 책이 재밌다고 하고, 나도 발견하지 못한 요소를 발견해내고 발표하기도 한다. 그렇게 변한 모습을 보다보면 보람을 느낀다. 수업이 끝나고 이렇게 블로그에 그날의 감상을 적어내려가는 것도 좋고. 아침에 늦잠자고 일어나서 유튜브 보는 토요일보다는 알차게 보냈다고 생각하니 피로가 풀린다.

 

운이 좋았는지 정말 좋은 학생들을 만나게 되었다. 우리 학생들은 모두 착하고 숙제도 잘 해오고, 별 문제 없는 편이다. 다만 화상수업이다보니 학생 하나가 카메라가 안된다고 꺼놓고 수업하면 정말 답이 없다. 내가 아무리 떠들어봤자 컴퓨터로 다른 화면을 보고 있으면 머릿속에 들어가는 것도 없을 것이다.

 

카메라 끄면 집중도가 떨어지는군!

한 아이가 수업시간에 카메라를 끄고, 숙제를 해오지 않기 시작하니 수업시간에 집중을 하지 못하는 게 보였다. 물론 카메라를 껐으니 뭘 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수업에 따라오지 못하는 건 안 봐도 눈에 선하게 보인다. (처음에 카메라를 끄지 말라고 강하게 주의를 줄 걸 하고 후회한다.)

 

지금까지는 숙제를 해오지 않는 학생에게 다음에 해오라며 관대하게 넘어갔지만, 그래도 한 아이가 3주째 숙제를 꼼꼼하게 하지 못한다. 이제는 훈육을 해야 할 시간이다. 사실 이 훈육이나 기강잡는 게 내가 제일 힘들어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어떻게 해야 내 말을 알아들을까? 

 

현장수업에서는 여러 가지 방법을 쓸 수가 있었다. 그중에서도, 소리지르거나 화내는 건 잘 통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방법을 쓰다간 내가 감정적으로 먼저 지치곤 했다. 좀 잘 통하는 방법은 그냥 가만히 아무 말 않고 쳐다보는 법이다. 

 

학생을 그냥 지켜본다

칠판 앞에서 우뚝 서서 가만히 잘못한 아이를 쳐다본다. 분위기가 이상한 걸 눈치챈 학생들은 나를 보고, 잘못한 아이를 보고, 또다시 나를 번갈아보고, 그러다 보면 교실이 싸아악 하고 조용해진다.

 

이럴 때 아이들은 잠깐의 침묵도 견디기 힘들어했다. 1분, 2분이 지나기도 전에 먼저 잘못했다며 사과를 하거나 고개를 숙인다. 그럴 때 어떤 행동이 잘못되었는지 알려주면 다음에는 행동이 교정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런데 이 수업은 몇년째 화상으로 진행되고 있고, 문제 학생은 카메라를 아예 끄고 있다. 내가 눈으로 째려봐도 그 아이는 아무 상관없을 것이다. 나머지 학생들을 모두 조별수업으로 돌리고, 숙제를 해오지 않은 아이와 1:1 면담에 들어갔다. 아이는 벌써 내가 한 소리 할 것이라는 걸 아는지 먼저 변명을 한다.

 

"선생님! 다음주에 시험이 있어요. 그래서 너무 피곤해요. 할 일이 너무 많아서 책을 못 읽었어요."

"그래, 나도 너 피곤한 거 알아. 그래서 숙제를 못 한 거야?"

"네, 좀 읽으려고 했는데..."

"네가 2주 전부터 숙제가 밀려서 너무 많아졌구나. 해야할 게 너무 많아지면 벅차지. 수업 내용도 잘 이해 못할때가 있지?"

"네."

"그런 것 같았어. 우리 수업은 숙제를 해오지 않으면 따라오기가 많이 힘들어. 토요일 아침에 기왕 일어난 거, 너 시간 아깝지 않도록 한번 충실하게 해보자."

"네, 선생님... 근데..."

"응?"

"근데... 저 이제 수업 이번달까지만 듣고 안 들을 거예요. 이제 끝인데요, 뭐. 어차피 그래서 전 조용히 있다가 다음달부터는 자유롭게 지낼 거예요."

"그래, 나도 너 그만둘 거라는 이야기 들었어. 그래서 너랑 이야기하고 싶은 거야. 선생님이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데, 들어볼래?"

"네."

"나는 네가 수업 때 항상 이야기도 잘하고, 학교 생활이나 집에서 있었던 일 공유해 주는 게 정말 고마웠어. 그런데 그런 이야기를 듣고 좀 생각나는 게 있어. 너는 네가 누구인지 알고 싶어하는 것 같아. 예를 들어 이전에는 네가 범성애자라고도 했다가, 무성애자라고도 했잖아. 그런 말들로 너를 아이덴티파이하는 것도 그렇고 말야."

"맞아요, 선생님. 저 그래요."

"그렇게 너를 표현한다는 건 네가 너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싶어한다는 거야. 그건 정말 좋은 거야. 계속 탐구해 나가는 거지. 나도 그렇고, 모든 인간은 그래. 자기가 누구인지 알고 싶어해."

"네."

"섹슈얼한 것 말고도, 너를 특정짓는 또다른 한 가지가 있어. 그건 네가 한국사람이라는 거야."

"그렇죠."

"네가 캐나다에 살면서 영어를 쓰건, 프랑스어를 쓰건, 어떤 생활방식을 택하든, 네가 한국인의 핏줄을 갖고 있다는 건 변하지 않을 거야. 그러니 네가 누구인지, 한국인은 어떤 사람인지를 알려줄 수 있는 한국어는 정말 큰 도구이자 무기라고 생각해."

"네."

"아마 지금은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 힘들 수도 있지만 언젠가는 알게 될 거야. 네가 한국어를 읽고 쓸 수 있다는 건 정말 큰 장점이야. 캐나다의 다른 친구들보다 너의 세계가 훨씬 넓다는 의미거든. 그리고 자기가 누구인지 찾아나가는 여정에서, 한국어가 큰 도움을 줄 거야. 난 그럴 거라고 확신해."

"네."

"만약에 네가 수업을 그만둔다면, 그건 네 결정이니 나는 억지로 너를 설득하거나 하지 않을 거야. 근데 그렇다면 다음 두 수업이 우리 마지막 수업이 될 수도 있겠지. 네 선택에 따라, 이 책은 네 인생에서 한국어로 읽는 마지막 책이 될 수도 있어."

"아..."

"물론 나는 그러지 않기를 바라. 혼자서도 한국어로 뭔가를 찾아보고, 한국어 책을 스스로 읽기 바라지. 하지만 영어가 더 쉽고 빠르기 때문에, 스스로 하려면 큰 노력이 필요할 거야. 너 말대로 해야 할 일도 많고, 당장 더 급한 일도 많거든. 그래서 네가 스스로 하지 않는다면, 이 책은 너의 마지막 한국어 책이 될 거야."

"그러네요."

"우리, 마지막이 될 지도 모르는 책을 미완성으로 남기지 말자. 정말 재밌는 책이야. 함께 읽어가면 정말 좋을 거야."

 

 

아이는 별 말이 없었다. 이 말이 도움이 될 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내 진심을 이야기했다. 내 마음이 전해졌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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