써야 할 회의록은 남았는데, 조지아가 아침부터 부탁을 해 온다.
"너 사무실에 있어?"
"응, 사무실인데."
"나 오늘 집에서 일하는데 프린트좀 해줄 수 있어?"
"어, 당연하지."
"근데 32장 뽑아야 하고, 잘라서 카드로 만들어야 해. 그러려면 그냥 종이에 프린트 하지 말고, 두꺼운 종이에 프린트 해야 해."
"다 잘라서 카드로 만들어야 한다고...?"
예감이 좋지 않다. 엄청난 일일 것 같은데. 괜히 한다고 했나?? 이런 잡무를 따쉬 꼬넥스(Tâche connexe)라고 한다.
나는 가위질이나 자로 재서 선을 긋거나 할 때마다 비스듬하거나 삐뚤삐뚤하기 일쑤다. 이런 업무가 제일 싫은데... 거절할 걸 그랬나?
"어휴, 이것도 다 따쉬 꼬넥스네! 불쌍한 것."
"하하, 그렇죠 뭐. 그냥 해야죠."
쟝이 내 앞에 놓인 종이조각을 보며 한 마디 한다.
가위질을 오래 해야 해서 손이 아파온다. 왜 조지아의 업무를 대신 해 주어야 하는지 짜증이 났다. 하아... 이건 아니야, 다 못 잘라!
이웃 복도의 쿰바를 보러 갔다.
"안녕, 쿰바! 잘 지냈어?"
"잘 지냈지. 고마워. 너도?"
"응, 고마워. 나 종이를 많이 잘라야 하는데, 혹시 큰 종이 한번에 자르는 기계 있어?"
"오, 그거 있어. 이리 와, 내가 사용법 알려줄게."
쿰바에게 복사집에서 쓰는 작두칼을 빌렸다. 사용법을 알려줬다고 해도, 잘 맞추는 게 여간 쉬운 게 아니다. 그래도 손으로 일일이 자르는 것보단 훨씬 시간이 덜 든다.
"아, 다행이야. 쿰바, 네가 날 살렸다!"
"뭘, 언제든지."
다행히 퇴근 전까지는 끝낼 수 있었다.
다 끝내고 조지아에게 연락을 했다. 일을 다 하고 나니 넘 지쳐서 조지아가 곱게 보이지 않는다. 조지아가 고맙다고 했는데도 원래 내 일이 아닌 걸 대신 해줬다는 생각에 좀 짜증이 났다. 고맙다는 말에 대답도 하기 싫어졌다. 마음이란 왜 이런 걸까.
나탈리에게 가서 카드를 건네니 무척이나 기뻐한다.
"아, 이걸 혼자서 다 만든 거야? 너무 좋다. 고마워! 이 카드 왜 필요한지 알아?"
"음... 금요일 전체 회의때 필요한 거 아니예요?"
"맞아, 쉐프가 125명인데 그 쉐프들이 다 자기 부서에 관한 건의사항이나 걱정거리를 여기다 써서 교환할 거야. 125명인데 132개나 만들었네?"
"아, 혹시나 해서요."
"그래, 너무 고마워! 정말 행복해. 사진 찍어서 보내야겠어."
"뭘요, 저도 행복하네요."
너무 좋아하는 나탈리를 보니 그제야 마음이 풀린다. 작고 하찮은 일이라도 인정을 받으니까 그런가? 조지아에게 괜히 퉁명스럽게 대했나 갑자기 되돌이켜 보게 된다.
쿰바도, 나탈리도, 크리스틴도, 마농도 다 나에게 웃어주었는데, 눈앞의 일과 부정적인 감정에 파묻혀 다른 사람의 미소를 그냥 지나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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