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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쳐리뷰/책 리뷰

독후감: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

by 밀리멜리 2023. 8.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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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병동에서 어떤 환자의 자살 시도가 있었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그 사람이 삶의 의미를 찾기를 하고 빌었다. 빅터 프랭클 박사의 '죽음의 수용소에서'를 읽고 나서 삶의 의미에 대해 계속해서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책은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은 정신과 의사 빅터 프랭클 박사가 체험한 이야기를 적은 글이다. 죽음의 수용소라는 제목만 듣고, 아우슈비츠, 대량 학살, 굶주림, 강제 노역 같은 내용이겠지, 그걸 읽으면 그걸 겪은 사람들의 공포가 얼마나 끔찍할까, 얼마나 고통스러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두려움보다는 마음이 충만해지는 느낌이다. 재미있어서 책장이 저절로 술술 넘어간다. 이 책을 벌써 이만큼이나 읽었나 하고 하나하나 읽는 게 아까울 정도였다. 다 읽고 나니 뭔가 개운하고 정화된 느낌이 든다. 이런 걸 카타르시스라고 하나?

 

 

 고통에 관하여

 

작가 빅터 프랭클은 아우슈비츠 체험을 '수많은 사람들이 겪었던 작은 고통'이라고 표현한다. 작가가 원래 낙천적인 성격을 가진 사람이기도 하지만, 강제 수용소의 체험이 작은 고통이라고? 말이 안 된다.

 

이 책에서는 끊임없이 고통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무엇이 사람을 고통스럽게 하는가? 폭력과 고된 노동, 굶주림이 육체적인 고통을 가져오기도 하지만 이 책에서 주목하는 것은 정신적인 고통이다. 믿음의 상실, 무너진 환상, 충격, 절망, 혐오감, 모멸감 등은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준다. 이런 고통이 어떻게 작을 수 있을까.

 

인간의 고통은 기체의 이동과 비슷한 면이 있다. 일정한 양의 기체를 빈 방에 들여보내면 그 방이 아무리 큰 방이라도 기체가 아주 고르게 방 전체를 완전히 채울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고통도 그 고통이 크든 작든 상관없이 인간의 영혼과 의식을 완전하게 채운다. 따라서 고통의 '크기'는 완전히 상대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빅터 프랭클, 죽음의 수용소에서. 청아출판사

 

고통이 마치 기체처럼 인간의 영혼과 의식을 완전하게 채운다는 말이 큰 울림을 준다. 어떤 고통에 맞닥뜨리면, 그것이 크든 작든, 우리는 그 고통에 사로잡히지 않던가.

 

작가는 고통을 피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견디기 어려운 고통, 생존자들은 어떻게 그 모두를 감내했을까. 이런 극한의 상황에서 도움을 주는 것은 유머, 사랑, 그리고 삶의 의미라고 말한다.

 

인간의 고통은 기체의 이동과 비슷한 면이 있다

 

 

 유머 - 자신에게 초연해지기

 

웃음은 고통을 잊게 만든다. 유머는 고통을 승화시키고, 자기 자신에게 초연해질 수 있도록 만든다. 빅터 프랭클이 창안한 로고테라피 요법에서는 자기 병을 자신으로부터 분리시키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신경 질환 환자가 자기 자신에 대해 웃을 줄 알게 되면 그것은 그가 자신의 문제를 스스로 처리할 수 있는 상태, 아니 어쩌면 병을 치료할 수 있는 상태에 이르렀다는 것을 의미한다.

 

유머는 어떤 성황에서도 그것을 딛고 일어설 수 있는 능력과 초연함을 가져다준다고 한다. 빅터 프랭클은 건축 공사장에서 노역을 하며, 옆에서 일하는 친구에게 유머 감각을 개발시키는 훈련을 했다. 적어도 하루에 한 가지씩, 재미있는 이야기를 만들어 내자고 한 것이다. 

 

그들은 너무 배고파서 수프 그릇 바닥의 콩 부스러기를 긁어 먹으려고 서로 안달인 상황을 농담거리로 만들고, 순시 감독의 "빨리빨리 움직여!" 하는 고함 소리를 흉내 내며 웃는다. 악명 높은 살인마 카포가 낭송하는 사랑의 시를 들으며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으려고 애를 쓰는 장면은 대단했다. 웃음 터지면 바로 목숨이 날아가는 상황이라니... 

 

'웃을 일이 없는데 어떻게 웃어?' 같은 생각을 했던 게 부끄러워지는 순간이다. 웃을 일이 나에게 찾아오기를 기다리는 게 아니라 지금 겪는 일을 웃을 일이라고 생각해야 하는구나. 내가 상황을 보는 시각을 재밌게 만든다면 유머가 되고, 그 순간이 아무리 고통스럽더라도 초연해질 수 있다. 아우슈비츠의 수용소에서도 웃음을 찾을 수 있는데, 지금 상황에서 웃음을 찾지 못할 이유가 뭐가 있나.

 

그럼에도 웃는 법

 

 

 사랑은 무엇인가

 

빅터 프랭클의 아버지, 어머니, 형제, 아내는 모두 강제 수용소에서 죽음을 맞았거나 가스실로 보내졌다. 수용소 안에서 그는 아내가 죽었는지 살았는지조차 몰랐다.

 

하지만 그는 고통 속에서도 아내의 웃음과 목소리, 시선을 느낀다.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충족감을 느끼고 짦은 순간이지만 더할 나위 없는 행복을 느꼈다. 얼어붙은 작업장 땅에서 곡괭이를 들고 마비된 몸으로 일을 하면서도 여전히 그는 아내를 생각했고, 그때 한 가지를 깨닫게 된다.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의 육신을 초월해서 더 먼 곳까지 간다. 사랑은 영적인 존재, 내적인 자아 안에서 더욱 깊은 의미를 갖게 된다. 사랑하는 사람이 실제로 존재하든 존재하지 않았든, 아직 살았든 죽었든 그런 것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 인간에 대한 구원은 사랑을 통해서, 사랑 안에서 실현된다. 

 

그는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하며 내면세계를 극대화시키고 피난처를 찾을 수 있었다. 이렇게 내적인 삶이 심화된 이후 그는 예술과 자연의 아름다움에 대해 전혀 느껴보지 못했던 새로운 것을 체험하기도 했다.

 

아우슈비츠에서 바바리아 수용소로 이송되는 도중 호송 열차의 작은 창살 너머 석양빛으로 찬란하게 빛나는 잘츠부르크 산 정상, 비밀 군수품 공장을 짓는 데 동원되는 숲의 키 큰 나무 사이로 햇빛이 비치는 아름다운 풍경, 끊임없이 색과 모양이 변하는 구름, 진흙 바닥에 파인 웅덩이에 비친 하늘의 풍경 (...) "세상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도 있다니!"

 

사랑이 무엇인가? 작가는 사랑이 다른 사람의 인간성을 깊은 곳까지 파악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며, 그 사람을 유일한 존재로 체험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정말로 그렇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은 누구도 그 자리를 대신할 수 없이 유일하다.

 

그는 고통 속에서 아내와 침묵의 대화를 나누며, '삶의 궁극적인 목적이 있는가' 하는 질문에 '그렇다'라는 대답을 듣게 된다.

 

잘츠부르크 산의 석양

 

 

 살아야 할 이유

 

왜 살아야 하는가? 

 

이 질문에 답할 수 있는 사람은 어떤 시련도 견딜 수 있는 힘을 얻게 된다. 그런 힘을 얻기 위해 열심히 내가 사는 이유를 찾아 보려고 했다. 그렇지만 좀처럼 딱 떨어지는 게 없다. 더 막막하기만 하다. 빅터 프랭클 박사는 이 질문은 말로 대답할 수 있는 게 아니라고 지적한다.

 

이 질문에는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답해야 한다. 자기가 원하는 구체적인 목표나 이유다. 이 행동은 누구도 대신해줄 수 없고 자기 스스로가 해내야 한다.

 

시련을 당하는 중에도 자신이 이 세상에서 유일한 단 한 사람이라는 사실에 감사해야 한다. 어느 누구도 그를 시련으로부터 구해낼 수 없고, 대신 고통을 짊어질 수도 없다. 그가 자신의 짐을 짊어지는 방식을 결정하는 것은 그에게만 주어진 독자적인 기회이다.

 

시련 속에는 무언가 성취할 수 있는 기회가 숨어 있다고 한다. 그 시련과 보상은 사람마다 다를 테지만, 작가인 빅터 프랭클은 자신이 쓰던 원고를 완성시켜야 한다는 과제를 삶의 의미로 받아들이고, 시련을 모두 겪고 난 후 세상에서 신 이외에 아무것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경이로운 느낌을 갖게 된다. 

 

시련 속에는 성취할 기회가 있다.

 

 

 삶의 의미

 

어떤 사람이 나치 수용소에 수감되어도 더 잘 살아남는가? 작가의 경험에 따르면, 자기가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더 잘 살아남았다고 한다.

 

신경정신과 의사인 작가 빅터 프랭클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힘은 자기가 쓰고 있던 글이었다. 아우슈비츠에 처음 잡혀 갔을 때 집필 중이던 원고를 압수당했고, 이 원고를 새로 쓰고 싶다는 강렬한 열망이 가혹한 환경에서도 그를 살아남게 했다고 한다. 아우슈비츠에서 부모님과 아내를 잃었고, 그가 풀려난 후에 빈 대학교 교수를 하며 책을 출판하며 92세까지 살았다. 

 

그렇다면 내 삶의 의미는 뭘까?

 

아무도 이 질문에 대답해줄 수 없다. 삶의 의미는 사람, 시기, 시간에 따라 다르며, 개인마다 고유하기 때문이다. 

 

작가는 몇 가지 힌트를 준다. 중요한 건, 추상적인 삶의 의미를 추구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삶의 의미는 누구나 갖는 구체적인 과제, 특정한 일과 사명이다. 삶의 의미는 자신을 대신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개인에게 부과된 어떤 임무이다. 그 삶의 의미를 찾는 방법을 책에서 엿볼 수 있다.

 

궁극적으로 인간은 삶의 의미가 무엇이냐를 물어서는 안 된다. 그보다는 이런 질문을 던지고 있는 사람이 바로 '자기'라는 것을 인식해야만 한다. 다시 말해 인간은 삶으로부터 질문을 받고 있으며, 그 자신의 삶에 '책임을 짐으로써'만 삶의 질문에 대답할 수 있다는 말이다. 오로지 책임감을 갖는 것을 통해서만 삶에 응답할 수 있다. 따라서 로고테라피에서는 책임감을 인간 존재의 본질로 본다. (...)

인생을 두 번째로 살고 있는 것처럼 살아라. (...)

로고테라피에서는 삶의 의미를 세 가지 방식으로 찾을 수 있다.

1. 무엇인가를 창조하거나 어떤 일을 함으로써
2. 어떤 일을 경험하거나 어떤 사람을 만남으로써 
3. 피할 수 없는 시련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기로 결정함으로써

빅터 프랭클, 죽음의 수용소에서. 이시형 옮김. 청아출판사.

 

이전에 신경정신과 의사 허규형 박사의 '나는 왜 자꾸 내 탓을 할까'라는 책에서 이 책의 소개를 보고 꼭 읽어봐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나는 왜 자꾸 내 탓을 할까 독후감 - 주의집중력과 불안

 

나는 왜 자꾸 내 탓을 할까 독후감 - 주의집중력과 불안

'나는 왜 자꾸 내 탓을 할까'라는 책을 읽었다. 요즘 회사에서 별 실수가 아닌데도 혼자서 괴로워하고 자책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 그러다 보니 이 제목이 마치 내 마음 같아서 집어들게 된 책이

milymely.tistory.com

 

'죽음의 수용소에서'는 기대했던 것보다 초월적인 내용이다. 이 책의 원제는 Trotzdem Ja Zum Leben Sagen: Ein Psychologe erlebt das Konzentrationslager, 한국어로 번역하면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삶에 대해 '네'라고 대답하는 것: 심리학자가 경험한 강제 수용소]이다. 멋진 제목이지만 길긴 길다. 영어판 제목은 Man's search for meaning, 번역하면 '삶의 의미를 찾아서'이다. 한국어판, 영어판, 독일어판 모두 제목 분위기가 달라서, 나라면 어떻게 번역했을까 생각해 보는 것도 재밌다.

 

가장 비참한 상황에서도 삶의 의미가 있다는 것을 알려준 책이다. 한번 읽기 시작하니 너무 재밌어서 책장이 술술 넘어가 이틀 만에 다 읽어버렸다. 더 놀라웠던 것은 이 책을 다 읽고 며칠 동안, 그러니까 책을 읽었던 순간보다 더 오랫동안, 삶의 의미와 시련, 고통, 삶의 의미와 사랑 등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볼 여유가 생겼다는 것이다.

 

얼마 전 정신병동 환자의 자살 시도 소식을 들었을 때에도, 평소라면 '결국은 죽지 않았어야 할 텐데...' 정도의 반응을 보였을 것 같다. 하지만 이 책을 읽고 난 후에는 그 사람이 삶의 의미를 다시 찾기를, 그리고 진정으로 충만한 삶을 살기를 빌었다.

 

마치며, 이 독후감을 쓰며 나 자신에게 몇 번이나 질문을 던졌는지 다시 읽어보니 웃음이 나온다. 왜 살아야 하는가? 사랑은 무엇인가?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 무엇이 사람을 고통스럽게 하는가? 빅터 프랭클 박사가 내 모든 질문에 대한 대답을 제시하지만, 나는 또 나만의 대답을 찾아야겠다. 나 자신, 그리고 내가 아는 모든 사람들이 삶의 의미를 찾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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