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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트리올 생활/몬트리올 일상다반사

스페인어 몰라도 알아 들을 수 있다

by 밀리멜리 2023. 8.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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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이가 12년만에 베스트 프렌드를 만난다고 하는데, 그 자리에 나도 오겠냐고 물었다. 나는 낯선 사람을 만나면 되게 어색해하고 말도 별로 없는 편이다. 내향적인 성격이어서 사람들을 만나면 에너지를 많이 쓰고 피곤해한다. 그래도 찬이의 베스트 프렌드고, 12년만에 만나는 친구를 소개시켜주고 싶다는데 가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내 성격을 다 아는 찬이가 먼저 걱정을 한다.

"너 피곤하고 가고싶지 않으면 진짜 괜찮아, 나만 만나고 올게."

이 말을 들었을 때 그냥 들을걸... 하는 생각이 든다. 

 

가뜩이나 회사에서 기록재기 달리기를 하고 난 뒤라 몸도 지치고, 회사일도 너무 많아서 피곤해 드러눕는 참이었다. 

 

근데 그래서 그런지 더 배가 고프다.

"으음.. 근데 나도 뭐 맛있는 거 먹고 싶은데."
"아, 우리 피자 먹을 거야."
"그럼 나도 갈래!"

 


결국 식탐에 못이겨(?) 찬이의 친구를 만나러 갔다. 의도가 이미 불순했구만. 

 

나는 이 자리가 조금 힘들었다.

왜냐하면 찬이의 친구가 멕시코인이었기 때문이다!

멕시코인이긴 하지만 영어를 할 수 있으니 말은 통해서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자리에는 친구의 여동생과 어머니까지 있었다. 특히 친구 어머니는 영어를 한 마디도 못해서, 모든 대화는 스페인어로 이루어졌다.

찬이 스페인어는 유창하진 않지만 그래도 하고 싶은 말은 다 하는 고급 수준이다. 중간중간 꽤나 고급스러운 어휘를 써가며 스페인어로 신나게 이야기를 하는 걸 보고 내심 부럽기도 하고 아무 말도 못 하고 있으려니 힘들기도 했다. 온갖 스페인어의 향연 속에서, '나는 왜 여기에 있는 거지'하는 생각이 들었다. 

난 스페인어를 듀오링고로 조금 배웠는데, 내 이름은 ~예요. 여기, 오늘, 지금 정도의 단어밖에 모른다.

12년만에 친구를 만나서 신나게 떠는 수다를 듣고 있기만 했다. 멍하게 있으면 찬이 친구 마우리시오나 찬이가 영어로 잠깐씩 통역해 주었다.

 

하지만 통역이 없어도 몇몇 스페인어를 알아듣기는 할 수 있었다. 신기하게도.

 

어째서 알아들을 수 있었던 것일까?

 

프랑스어와 비슷해서 그렇기도 하지만, 아무래도 회사에서 프랑스어를 배우며 키운 눈치(?)가 빛을 발한 것 같다. 언어보다 눈치를 먼저 키워서 그런지, 말을 몰라도 무슨 말을 하는 것 같다는 알아차릴 수 있는 경지에 올랐다.

 

대충 옛날에 서로 만났던 이야기를 하는구나, 이건 밥에 관한 이야기구나, 요즘 하는 일에 관한 이야기구나, 식사 취향은 뭘 좋아하는구나, 등등...

 

그 중에 제일 알아듣기 쉬웠던 말은 마우리시오 어머니가 말한 "멕시코 여자들은 섹시하지💃!" 였다. 과연 말 그대로, 마우리시오 어머니는 어깨가 드러난 빨간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피자에 곁들여 먹을 매운 오일이 함께 나왔다. 매운 것을 잘 먹냐는 이야기에 이렇게 대답했다.

"꼬레 델 수드, 꼬모 꼬미다 피칸테, 무이! 캐나다, 노 꼬미다 피칸테! 아오라, 노노!" (한국, 매운 음식 많아 먹어! 캐나다, 매운 음식 없어. 지금 매운 음식 못 먹는다)

나의 이 말에 모두가 배를 잡고 웃었다. 그래도 어떻게 한 마디는 했구나.

내가 마구잡이로 스페인어를 말하자 친구 어머니가 하이파이브를 해 줬다.

"하하하하!  내가 영어하는 만큼 스페인어를 하는구나!"

멕시코 사람들은 정말 유쾌하고 활발한 것 같다. 

 

스페인어를 대충이라도 알아들은 건 정말 놀라운 경험이었다.

 

언어를 배울 때 정말 중요한 것은 언어실력과 시험성적이 아니라, 이해하려고 하는 노력이 아닌가 싶다. 아무 말도 안하고 힘들게 앉아있었지만... 알아들으려고 애를 쓰니 뇌가 알아서 그냥 저절로 돌아가는 것 같다. 프랑스어를 못 알아들을때도 이런 느낌을 많이 받았는데, 스페인어에서도 똑같은 느낌을 받았다.

 

결국 언어는 소통하기 위해 만들어진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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